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헨델 흥겨운 대장장이'

 

 

사람들은 감각으로 기억을 저장한다. 향만 맡아도 특정 순간이 떠오르는 '프로스트 효과'처럼, 음악은 내 기억을 선명하게 불러오는 매개가 된다.

 

음악은 삶을 환기한다. 산책할 때, 일할 때, 무슨 곡을 듣느냐에 따라 같은 풍경도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감정은 단조로운 하루를 보다 특별하게 바꾼다. 하물며 여행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음악과 함께한 여행은 풍경에 색채를 더하고,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비디오 테이프' 같은 존재로 남는다.

 

 

 

강릉


 

나는 매년 이맘 때 쯤, 혼자 강릉을 찾는다. 첫 강릉 여행의 인상이 너무 선명했기 때문이다. 스무살 때부터 혼자 놀러다니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은 왜인지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이십대 중반이 될 때까지도 혼자 여행을 떠나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여행을 하게 된 계기는 강릉시립교향악단의 공연이었다. 발표 된 프로그램에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있었다. 평소 피아노가 없거나 적은 곡을 어려워 했지만 이 곡만큼은 실제로 꼭 들어보고 싶었다. 공연을 보러 갈 겸 강릉행을 결심한 나는 곧장 표를 예매하고 여행 계획을 세웠다.

 

처음으로 나 홀로 오롯이 떠나는 여행을 준비했다. 이전의 여행계획과 달랐던 건, 어디서 무엇을 먹고 몇시에 어디로 간다는 일정표가 아니라, 각 순간에 어떤 음악을 들을지를 고르는 계획이라는 점이었다.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출발할 때 처음 들은 곡은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이었다. 이 곡은 처음으로 떠나는 단독 여행에 어울리는 곡이었다. 나는 이 여행이 설렜던 만큼 걱정도 많았는데, 결국 그 모순적인 마음을 여행 시작의 순간까지 떨치지 못하고 버스에 올랐다.

 

방랑자 환상곡은 총 4악장이다. 빠른 템포의 1악장에서 시작해 2악장에서 잠시 침잠하고 3, 4악자엥서 다시 방랑하며 유쾌하게 마무리된다. 특히 화자가 유토피아를 찾아 헤메는 이야기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낙원을 상상하고, 또 바라며 떠난 화자가 세상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다는 걸 깨닫고 방황한다. 그럼에도 언젠가 만날 낙원을 위해 다시 유랑하는 당찬 모습이 잘 담겨있다. 버스에서 내내 이 곡을 들었는데, 그 희망적인 마무리가 불안했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강릉은 예상보다 훨씬 조용한 모습이었다. 경기도보다, 어쩌면 본가 동네보다도 훨씬 한적한 도시의 모습에 갑자기 마음이 끌렸다. 잔잔함에 들뜬 나는 곧장 숙소로 가 짐을 풀어놓고 미리 봐뒀던 독립서점들로 향했다.

 

여행을 가면 평소에 미뤘던 일상을 다시 채우려 노력하게 된다. 책을 읽는 것이라던가, 집중이 안 돼 쓰지 못한 일기나, 떠오른 아이디어들을 적는다던가, 미처 답장하지 못한 메시지를 보내는 일 같은 것들이다.

 

독립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고, 강릉시 인근을 산책하며 꽃을 구경했다. 근처 카페에서는 책을 읽으며 밀린 일기를 하나씩 적었다. 매번 모니터를 보며 화면 속 글씨를 응시하던 마음들이 하나씩 풀리는 기분이었다. 꼬여있던 수십 개의 콘센트를 하나씩 분리해 정리하는 것처럼, 하나 하나 깔끔히 매듭을 지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리스트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

 

 

해가 질 즈음에는 경포호를 걷다가 밤바다로 향했다. 바다에서는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번'을 들었다. 이 곡은 리스트의 [이탈리아 순례의 해 2번] 중 5번째 곡으로, 리스트가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의 사랑 시를 읽고 피아노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부드럽지만 강렬하고, 순응적이지만 뻗어나가는, 규정할 수 없는 날뛰는 마음들이 담겼다. 이 흐름들이 파도 치는 밤바다를 볼 때 밀려드는 다양한 감정과 닮아있었다.

 

당시에 나는 커다란 파도가 밀려들고 밀려나는 모습에서 평소 내 생각과 감정들이 얼마나 깊게 자리했는지를 실감했다. 큰 파도와 자연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고민들은 평생 달라붙어 나를 좀먹을 것 같았다. 긍정과 부정의 마음, 모순적인 생각들이 휘몰아치는 상황을 그저 흘려보내려 노력하고 있을 때, 이 곡이 내비치는 혼란스러운 정서가 같은 마음으로 공명하는 듯 묘한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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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에는 산뜻한 마음으로 강릉아트센터에 갔다. 나는 공연장을 참 좋아한다. 공연 일을 할 때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을 반복하면서도, 연습실과 공연장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그 순간만은 마냥 즐겁기만 했을 정도로. 새로운 지역의 새 공연장에 들어가는 것은 내 인생에 몇 안되는 큰 설렘이었다. 공연 시작 몇 시간 전에 도착해 로비를 구경하고 주변을 산책했다. 그리고 한 카페에 들어가 리플렛에 적힌 오케스트라 설명과 곡 설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프로그램 곡들을 찬찬히 들어보았다.

 

 

KBS교향악단의 '베르디 운명의 힘 서곡'

 

 

앞서 말했듯 오케스트라 곡을 어려워했기 때문에 입장하는 순간까지도 피아노 협주곡 만큼 큰 기대를 갖진 않았다. 그러나 막상 공연이 시작되자 단원 개개인이 이 곡을 위해 홀로 연습했을 수많은 시간들이 체감되기 시작했다. 이 곡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오래 다듬고 연습했을까. 그 순간들을 떠올리자 곡의 선율을 하나하나 귀기울여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쇼팽 콩쿠르 결선 진출자들을 통해 무수히 들었던 그 어떤 무대보다도 생생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눈 앞에, 내 귀에 직접적으로 들리는 감각이 선명하고 신기했다. 그렇게 40여 분 동안 눈과 귀를 떼지 못한 채 곡을 꾹꾹 눌러 담았다.

 

 

피아니스트 윤디리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3악장'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도 공연 프로그램이었던 세 곡을 다시 들었다. 많은 연주자들의 무대를 돌려보면서 또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클래식 음악만큼이나, 음악을 사랑하는 연주자들의 애정 어린 에너지를 아끼고 좋아한다는 것을.

 

돌아오는 버스에서 처음으로 교향곡에 빠져들어 당시 연주자들이 주던 긍정적인 에너지를 다시 한 번 채우며 첫 강릉 여행을 마무리했다.


지금도 그때 들었던 곡들을 들으면, 당시 내가 강릉에서 느낀 무수한 감정과 기억, 그리고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강릉을 다시 느낄 수 있다. 매년 강릉에 가 경포대, 책방 등을 돌아다닐 때마다 1년 전에 내가 앉아있던 곳, 2년 전에 내가 책을 고르던 장소, 여행하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강릉은 그 때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장소가 된다. 그리고 결국엔 더 이상 나 혼자 여행하는 공간이 아니게 된다.

 

여행에 감각을 더하면, 일상 생활에서도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다. 올해도 강릉으로 떠날 날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첫 여행의 기억을 돌아보았다. 작년, 제작년, 그 전의 나를 만날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았음을 생각한다. 대단한 여행 방식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 번 쯤은 음악과 함께 여행을 떠나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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