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늘 지나고 나서야 선명해진다. 여름의 채도가 높아지는 순간들은 대체로 거창한 사건보다는 문득 듣게 된 노래 한 곡, 걷던 길의 공기, 그날의 빛 등으로 쌓인다. 음악은 그런 순간들을 잊지 않고, 별것 아닌 일상적인 날을 특별한 여름의 장면으로 되살리는 촉매가 되어준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 소개할 곡들은 흔히 말하는 ‘여름 노래’와는 다를 수 있다. 계절을 노래하지 않아도, 나에게는 분명 여름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음악이 흐르던 순간들이 내 여름의 온도와 색깔을 기억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여름에도 작은 파장이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노래들을 건넨다.
WurtS - 解夏
해하(解夏)는 불교에서 여름의 안거를 마치는 날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무더위가 이 노래의 청량한 사운드와 묘하게 어우러진다.
곡은 청량한 일렉트릭 기타 리프와 리듬감 있는 드럼이 이끄는 경쾌한 인트로로 시작한다. 여기에 겹겹이 얹힌 신디사이저와 일렉트로닉 효과가 사운드를 부유하게 만든다. 곡의 템포는 빠르지 않지만, 리듬 자체는 발끝을 두드리게 하고, 보컬의 얇고 다소 유려한 톤이 묘한 무중력감을 선사한다. 마치 한여름 햇빛에 덴 공기 속에서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듯한 청각적 인상이다.
機嫌を損ねる君とブルース (기분 상한 너와 함께하는 블루스)
弱音も溢れる朝 (약한 마음이 새어 나오는 아침)
다만, 가사는 오히려 우리를 찌푸리게 만드는 일상의 모서리를 아주 담담하게 묘사한다. 담백하고 짧은 가사는 여름의 피부 온도와 닮다.
正午過ぎの群青 (정오가 지난 군청빛 하늘)
冷房24度の天井 (냉방 24도의 천장)
ヒヤッとパッと (찰나의 시원함)
夏の3秒 (여름의 3초)
냉방 24도의 천장 아래에서 지나치듯 마주치는 찰나의 감각들. 여름은 뜨겁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늘 어딘가 엷고, 잠깐 시원하다가 사라지는 탄산처럼 허무하다.
비행기 안에서, 모르는 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흘러나오던 멜로디. 허무함을 이야기하는 가사들이 오히려 묘한 위로가 됐다. 모든 게 다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은 여행을 떠나고, 다시 사랑을 하고, 또 상처받는다. 그래서인지 이 곡을 듣는 순간마다, 나는 언젠가의 여름과 언젠가의 길 위를 동시에 떠올린다.
RADWIMPS - 05410(ん) Okoshite
이 노래는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갑작스럽고, 경쾌하다. RADWIMPS의 대표적인 콘서트 곡이기도 한 이 노래는 시작부터 빠르게 내달린다.
Wake me up, wake me up, wake me up when you come back
(네가 돌아올 때 날 깨워줘.)
반복되는 후렴이 전체 리듬을 끌고 간다. 사운드는 전반적으로 발랄하지만, 코드 진행에는 쓸쓸함이 배어 있고, 그 위에 얹힌 나지막한 목소리는 장난기와 진심이 뒤섞인 채 감정을 튕기듯 흘린다. 일렉트릭 기타와 심플한 드럼, 간헐적으로 터지는 신스가 청량한 텍스처를 만들어낸다. 영어와 일본어 가사가 서로 다른 정서의 리듬을 교차시키며, 곡에 자유롭고도 불완전한 감정을 부여한다.
I can be your best friend (난 네 최고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I can be your least friend( (가장 먼 친구가 될 수도 있고)
I can be your boyfriend (네 남자 친구도 될 수 있어)
But I don't wanna be your ex-friend (하지만 네 전 남자 친구가 되는 건 싫어)
감정의 경계를 명확히 정의하지 못한 채 맴도는 청춘의 말투가 이 곡의 핵심이다. 밝은 멜로디 아래에 감춰진 솔직한 무기력과 혼란, 그리고 관계에 대한 애정과 두려움. 직선적인 가사는 복잡한 감정 상태를 유머와 리듬으로 흘려보낸다.
장마철, 회색빛 도심을 걷는 날 들으면 사운드 자체가 우산을 두드리는 빗방울과 겹치며, 축축했던 기분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멜로디는 밝지만, 혼란스러운 감정을 특유의 가사 균형이 이 곡을 오래 듣게 만든다.
Hikaru Utada – One Last Kiss
여름 출근길의 아스팔트, 차가운 음료를 손에 쥐고 햇빛을 피하던 그 순간. 귓가에 흐르는 노래는 마치 바람처럼, 때로는 바다처럼 느껴졌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의 주제곡으로 발표된 이 곡은 우타다 히카루 특유의 미니멀한 작법과 섬세한 사운드 배치가 돋보이는 곡이다. 도입부는 단순한 피아노 루프와 리버브 처리된 보컬로 시작해, 잔잔한 무드를 형성한 뒤 점차 신스 베이스와 리듬을 추가하며 곡을 확장한다.
우타다의 보컬은 곡 전반에 걸쳐 낮게 깔리며, 격정적으로 고조되지 않고 감정을 눌러 담는 방식으로 쌓인다. “I love you more than you’ll ever know”라는 구절은 곡 전반에 반복적으로 삽입되어 감정의 중심을 붙잡아주며, 이 반복은 곡의 정서적 중력을 형성하는 리듬 장치로 작동한다.
燃えるようなキスをしよう (타오를 듯한 키스를 하자)
忘れたくても (잊고 싶어도)
忘れられないほど (잊을 수 없을 정도로)
〈One Last Kiss〉는 전형적인 발라드나 일렉트로닉 음악의 극적 전개를 택하지 않는다. 대신 최소한의 사운드로 최대한의 정서를 구성하며, 이 구조는 곡 자체를 하나의 정적인 풍경처럼 느끼게 만든다.
여름의 아스팔트 위, 바람과 자동차 소음 사이에 섞여도 흐릿하게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는 잔향이 있다면, 이 곡은 그런 잔향에 가깝다.
양문학(羊文学) – Burning
이 곡은 유난히 여름밤과 잘 어울린다. 그것도 선풍기 앞, 고요하고 눅진한 밤. 겉으로는 차분하고 몽롱한 일렉 사운드지만, 가사 속에는 차마 말하지 못한 감정과 불완전한 자아에 대한 뼈아픈 자각이 묻어 있다.
TV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 시즌 2의 엔딩 테마곡으로 알려진 이 곡은 담담한 보컬과 잔잔한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중심을 이루는 곡이다. 몽환적인 패턴과 드럼 루프가 차분히 깔리며 곡 전체에 서늘한 긴장을 부여한다. 사운드는 과하지 않으며,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정을 ‘견디는’ 형태로 유지된다. 곡의 후반부에서는 기존의 단조로운 비트 위에 감정의 누적처럼 신스 층이 덧입혀진다. 소리의 층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말하지 못했던 감정이 점점 곡을 덮어버리는 느낌이다.
傷きずつくのが癖くせになってる (상처받는 게 버릇이 됐어)
誰だれを許ゆるせないの? (누구를 용서할 수 없는 거니?)
가사는 내면화된 분열과 고립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이 직설적인 언어는 사운드의 담백함과 만나면서 감정의 과잉 없이 곡의 서사성을 유지한다. 이 절제는 곡을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의 감정을 투사하게 만드는 여백을 남긴다.
〈Burning〉은 내면의 감정을 누르고 작은 불씨처럼 유지한다. 열기는 격정이 아닌 지속이다. 여름밤의 정적, 깊은 생각의 흐름과 어울리는 음향적 밀도를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곡을 유난히 잠들지 못한 여름밤, 선풍기 바람에 실려 어깨를 두드려주는 노래로 기억한다. 땀도 눈물도 말라붙기 전, 그 모든 것을 조용히 태워내는 목소리가 좋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기억하게 만드는 건 언제나 음악이었다. 그리고 나의 여름은 언제나, 그 음악의 온도를 닮아 있었다. 새로운 노래가 다시 익숙한 계절을 담아낼 수 있길 바라며, 매년 여름마다 나의 시간을 기록해 줄 곡들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