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1. 생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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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살다 보면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게 있겠다. 이를테면, 완전히 뚜껑이 잠기지 않은 300ml 생수병을 에코백 안에 넣는다든지. 맨발로 샌들을 신으면 상처가 나는 걸 알면서도, 아침마다 나도 모르게 그 신발을 신는다든지. 

 

왜 뚜껑을 제대로 잠그지 않았을까. 애초에 다 마셔버릴걸. 습관적으로 신어버린 신발, 신발장에 미리 넣어놨어야 했지—하면서 물웅덩이에 시선을 둔 채, 애꿎은 사람을 떠올리며 중얼거린다. 누구를 생각하고 있나? 우둔한 나 말고는 없다.

 

더운 실내에서 물기를 탈탈—턴다. 가장 눈에 띄는 우선순위대로 꺼내어 휴지를 가져다 댄다. 태블릿, 핸드폰, 손선풍기... 오늘 딱—들고 나온 태블릿은 물청소를 제대로 치렀다.

 

닦는 건 별생각 없었다. 다만, 내 기를 제대로 앗아간 건 에코백이었다. 물기를 흡수해주는 휴지는 고마웠지만, 천으로 된 가방은 그대로 받아내다 못해 아래로 여과시키며 쏟아냈다. 제 기운까지 담아내려는 듯, 남색이 보랏빛을 흘려냈다. 한숨보다 더한 고단함이 턱끝에 스몄다.


사실 그날은 꽤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7월 30일엔 줄라이 페스티벌 공연도 보고 왔고, 좋아하는 연주자들을 눈에 잔뜩 담았다. 평소보다 두 시간 늦게 일어나 부모님과 외식도 하고, 여유롭게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김밥도 샀고, 레몬맛 곤약젤리도 잊지 않았다. 

 

수면이 조금 부족했는지 목이 칼칼했지만, 편도염 약도 미리 챙겨 먹었고, 키보드를 내려놓을 장소를 바꿔보자 싶어 ‘ㅇㅇ동 조용한 카페’를 검색해 마음에 드는 위치를 정했다. 오늘은 여기서 밤 8시까지 글을 쓰리라.


원래 내게 카페는 친구들과 이야기하거나 시간이 뜰 때 들르는 곳이었다. (카공이 안 되는 사람) 그러니 이 선택은 꽤 일탈적인 행위였다. 그래, 이때까진 순조로웠다. 찰나에 놓친 생수병이 왈칵— 쏟아졌을 뿐이다.


한순간에 기운이 쭉 빠졌다. 퇴근 시간을 살짝 비켜간 한적한 승강장 앞에 섰고, 자리에 앉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잠이 들었다.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한 잠결은 꼭 집 가는 길에 튀어나온다.


지친 것 같다. 20분이나 깊게 잠을 청했으니 집에 오면 생기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어깨와 팔이 흐느적거렸다.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약속은, 다짐이라도 되뇌이지 않으면 밤새 이불 속에서 뒤척일 사람이란 증명일지도 모른다. 인생은 하루보다 더 짧은 시간 안에서도 기분이 오락가락한다. 어제만 해도 마음은 기쁨과 아쉬움으로 꽉 찼는데—.


오늘은? 30일의 기쁨 무색할 만큼 무덤덤하다. 공연을 자주 다니다 보면 이 무미건조하고 무관심해지는 무념무상이 곤란하다. 괜히 애먼 것에 불똥이 튀고, 타인의 대답과 시점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니 이 순간을 어디에 내뱉기보다는, 내 안에 간직한 채 데굴—데굴— 굴려내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데굴— 데굴— 굴린다고? 무엇을 말인가. 마음 안의 동그란 ‘원형’이다. 원형은 무엇이며, 왜 그것을 내놓으려 하는가. 6월의 내가 그 답을 줄 수 있겠다.


 

이를테면, 원점으로 돌아오는 길이겠다. 가장 평온하다고 느끼는 감정선 위에 다시 두 발을 내딛기 위함이다. 감정의 낭떠러지나 안전지대에서 밀려났을 때, 우리는 돌아본다. 이런 갑작스러운 추락이 무서운 건, 예고가 없다는 점이다.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든, 발생할 상황은 주어진다. 굳이 발을 빼 모른 척할 수 있었지만, 쌓여가는 과업과 욕심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 풍선을 날로 그었다면, ‘펑’ 소리는 따라온다. 단 한 번의 순간이지만, 그 폭발력은 크다.


6월이다. 뭔가에 잠식되어 허송세월하기엔 초여름은 싱그럽다. 내 시야를 타인으로 인해 어둡게 할 수 없다. 내뱉은 자보다 목도한 자가 더 긴 시간을 슬퍼하는 일은, 내 세상에선 너무 억울하고 치욕적인 일이다. 언제나 나를 ‘비추는’ 방향으로 서 있어야 한다. 그토록 지켜내고자 했던 ‘원형’이 딱딱한 ‘네모’로 변하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토록 좋아하는 현악기에 문을 두드렸지만, 이상하리만큼 위로가 안 됐다. 저 밑바닥 돌길 위에 서 있는데, 바이올린은 하늘을 노닌다. 거리감이 있어 그 소리에 내 것을 온전히 맡길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지하철 스크린도어가 열리기 직전, 바흐의 ‘골든베르크’가 스쳐 지나갔다. 불현듯, 강렬하게 이 곡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흐로 네모를 사포질하는 법>

2025년 6월 22일

 

 

결국 생수병을 가방에 넣기 전, 두 시간 늦잠을 잔 그 상태로 되돌려놓겠다는 것이다. 짐을 챙기고 카페를 고민하던 몇 걸음 뒤로도 괜찮겠다. 일단— 이 모든 게 귀찮고, 지겹고,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상태를 잊어내는 게 먼저다.


MBTI 검사를 하면 늘 확정적으로 나오는 건 계획형 J였다. 계획을 짜는 즐거움보다, 그게 어그러졌을 때 오는 스트레스가 더 큰 사람. 딱— 적당한 체력으로 30일의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5중주와 비올라 소나타를 마주할 눈망울을 남겨두었는데, 그 생수통이, 물자국이, 다 끊어내버렸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가야 한다. 왜? 글은 써야 하니까.

 

 

 

2. 유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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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자,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길이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휘적거리며 흐느적—흐느적—걸으려면 노래가 필요하지 않겠나. 다행히 낮에 시켰던 이어폰이 당일 밤에 도착했다. (좋은 세상) 새 것 특유의 새침함이 있다. 뚜껑이 빠르게 닫힌다든지, 아귀가 딱 안 맞는다든지. 그런데 헌 케이스에 들어가니까 기세가 꺾인다.


보통 내 유턴송, 원래의 기분으로 되돌아가는 길목엔 바흐의 ‘골든베르크’가 있었다. 명상적이고 반복적이며, 진짜 가볍게 들으면 잠에 빠져버릴 수 있는 곡인데, 첫 곡 아리아부터 종결 아리아까지 쭉 듣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그렇다면 7월의 나는 무엇으로 이 생수병을 잊을 것인가? 마침, 30일의 쇼스타코비치 비올라 소나타가 내 곁에 있다.


2025년 7월 30일, 줄라이 페스티벌 실내악 네 번째 무대에서는 피아노 5중주 G단조 Op.57과 비올라 소나타 Op.147이 연주되었다. 피아노 5중주는 푸가와 스케르초 등 다양한 양식이 섞여 있으며 긴장감과 리듬감이 뚜렷하다. 비올라 소나타는 쇼스타코비치가 생의 말미에 완성한 유작으로, 절제된 흐름 속에 단순한 선율이 교차하며 차분한 분위기를 만든다.


예습 없이 공연장에서 비올라 소나타를 처음 들었다. 첫인상이 어땠더라? 1악장에서 3악장까지, 전부 정적이었다. 명상보다도 더 고요하고, 담담했다. 함께 공연을 본 클래식 초심자 친구의 표정이 걱정될 정도로—소나타는 곧고, 나지막하고, 그리고 무척 독립적인 흐름을 따랐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분명 합주를 하고 있는데도, 자의 자리에서 따로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화롭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올라가 한 걸음씩 내디디면, 대각선 맞은편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우연히 박자가 겹친 이름 모를 사람들처럼.


화면으로 따지자면, 각자의 위치에서 걷는 두 주인공이 나란히 담긴 이분할 장면이겠다. 그만큼 소리와 소리만으로 30일을 마무리하는 느낌이었다.


피아노 5중주는 어떠했던가? 악보만 보면 여섯 개의 오선이 나란히 놓였을 뿐 보기엔 단순한데, 소리로 들으면 거센 파도였다. 더군다나 제2바이올린에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도 있다. (신나) 그런데도 내가 ‘비올라 소나타’를 첫 번째 동행자로 택한 건, 아무래도 내게 바이올린은 ‘기쁨’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활과 현 사이에서 피어나는 모든 것들이 내 시야를 반짝이게 하고, 마음을 붕붕— 띄워주곤 했다. 그래서 내가 저 밑 웅덩이 속에 빠져 있든 말든, 현악기의 소리는 늘— 나보다 높은 창공 아래 떠 있었고,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니 그것은 그대로 두고, 내가 다시 원래 있던 제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역순으로 30일의 쇼스타코비치 실내악을 되짚어보려 한다. 첫 번째 무대는 기쁨이었고, 두 번째 비올라는 담담한 정돈이었으니—거슬러 올라가야만 그날을 온전히 마음에 새길 수 있을 것이다.

 

 

 

 

 

3.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Op.147 ㅡ 김세준(Viola), 박종해(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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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당신은 비올라라는 현악기를 마주해본 적이 있는가? 바이올린이나 첼로에 비해서 메인으로 공연이 진행되는 비중이 약한 악기지만, 현악 4중주의 품이나 협연의 악기로 등장했을 때 꽤나 매력적인 소리를 낸다. 어떤 매력일까? 2025 예술의 전당 교향악 축제에서 비올라 협연곡을 듣고 쓴 후기를 돌아보자.


 

비올라는 튀어나오지 않는다. 오케스트라가 둥근 원을 빙글빙글 그려낸다면, 그 테두리를 볼드체로 둘러싸 깊이를 더해주는 악기다. 그 깊이를 어떻게 더해주는가? 둥근 원을 둘러싼 끝이 모나지 않은 선들이 사선의 형태로 소리를 에워싼다.


사선? 내가 들었을 때 바이올린은 높고 또 낮게 큰 원을 그리기도 하고, 삐죽삐죽 거리기도 한다. 첼로는 바이올린보다는 더 깊은 영역을 파고들다가도, 새처럼 높게 한 번씩 날아오른다. 긴 영역에서 노는 것이다. 비올라는 그렇지 않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경계 안에서 아주 미세하고 얇게, 선을 대각선 형태로 그어 나간다. 마치 우리가 스케치북에 흑연필로 빗금을 칠하듯이 말이다.

 

2025년 4월 10일

 

 

사선의 빗금을 치는 연필을 닮은 소리를 내는 악기가 내 안에서 ‘비올라’였다. 다만, 이 날의 김세준 비올리스트는 사선이라기보다는, 올곧은 직선을 천천히—또 나지막이—내려놓았다. 연주가 이뤄진 시간 동안 대부분 눈을 지그시 감고 계셨다가, 연주의 모든 소리선이 사라진 후에야 관객석을 마주하셨다.


기다림이다. 자신이 피워냈지만, 손 밖으로 내세워진 것을 충분히 마주하고 떠나보낼 줄 아는 이의 자세겠다. 연주도, 외형적인 면모도 꽤나 진중하게 활을 그어내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약간, 무사 무휼이 활시위를 당기고 정제하는 느낌이랄까... 이제는 그 소리선 안에 들어가 보자.

 

 

I. Moderato (보통 빠르기로)

기다렸다. 연주가는 공기 사이로 소리를 얹기 전에, 가만히 기다렸다. 공연을 자주 다녀보며 깨닫게 된 건, 연주의 시작과 끝에 존재하는 잠깐의 소리의 ‘공백’도 그 공연의 일부라는 것이다. 가끔 클래식 관련 일화를 들어보면, 악장과 악장 사이에 예상치 못한 브라보나 박수 같은 웃픈 이벤트가 발생하기도 한다. 워낙 고요한 공간이고, 옷자락 하나 스쳐도 그 소리가 꽤 멀리 퍼져나가는 스팟이기 때문에, 아주 작은 소리 하나가 많은 이들에게 깊이 각인된다.


대체로 이 하우스콘서트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일단 마룻바닥에 앉아 연주가와 온전히 시선을 맞추러 오는 관객이라면, 그날의 악사가 빙긋 웃으며 자리에 일어서거나 팔을 내려트리기 전까지는 양손을 들어 올리지 않는다. 연주가도 그러하다. 어느 때보다 많은 관객이 모인 오늘, 고요히 쇼스타코비치의 소리를 타올리기 위해 충분히 마음을 내려놓고, 활을 들어 올린다. 그 찰나의 정적 속 숨결 사이로 스미는 공기의 소리를 귓가에 담아 보시라.


김세준 비올리스트가 ‘보통 빠르기로’ 현을 튕겨내는데 이상하리만큼 가야금이 생각났다. 그렇다고 국악 같았다는 뜻은 아니다. 박종해 피아니스트는 조용히 그 길을 뒤따른다. 연주가의 표정을 보시라. 눈을 지그시 감고, 중간 지대 어느 지점으로 향하고 있다. 막 치솟는 것도, 가라앉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듣게 되는 소리라는 게 있지 않은가? 소리가 고요히 울렁이다 다시, 검지로 현 위를 둥—둥—


이유를 알 수 없는데 마냥 집중되는 느낌을 아시는가? 딱, 이러하다. 43:30, 갑자기 두 갈래로 확— 소리의 선이 퍼져나간다. 바이올린이 짙어지면 수성펜이 되고, 비올라는 짙어지면 심두께가 바뀌는 것 같다. 흑연이 그저 펼치는 영역을 넓혀갈 뿐이다. 두드림의 시간이 도래한다. 피아노 건반 위에도 달그락거리는 왼손 하나뿐이다.


그러다 확— 힘을 주는데, 어찌 이리 서정적인가? 보통 바이올린은 이럴 때 높은 곳에 확 도달해버리고, 첼로는 깊은 웅덩이를 파버리는데, 비올라는 어떠한가? 굳이 어디로 갈 필요도 없다는 듯, 그저 제 갈 길을 위해 더 휘갈길 뿐이다. 넘칠 것처럼 아슬아슬하지도 않다. 애초에 워낙 안정적인 흐름 속에서 무겁게 긁어내며, 사선의 영역을 더 넓게 파고들며 오간다.


46:16, 서서히 내려앉는다. 왼쪽 아래로 파동을 그리며 천천히 가라앉는 소리. 그러다 활을 가볍게 현 위에 짧게 그어낸다. 아주 옅게 가로의 8자를 그리다, 비올라를 일자로 잠시 내려놓는다. 그 순간, 악기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피아니스트가 한 페이지를 넘기는 찰나, 기둥처럼 서 있는 비올리스트의 옆틈으로 빗금이 지체되지 않는 정도로 그어지기 시작한다. 이—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상태. 미묘함만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도 시선을 끌 수 있는 건, 연주가의 역량에서 나오는 것이겠다. 뭔가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정돈되어 있고, 정직하다. 무엇을 더 내보이겠다는 욕심보다는, “쇼스타코비치가 이리 하라 하였다”—그 의도를 충실히 따르는 마음이 둥—둥— 떠다닌다.


박종해 피아니스트가 마룻바닥을 저음으로 강하게 진동시키는 사이, 비올라는 서서히 짙어지며 시선을 빼앗는다. 얇은데 심지가 여러 겹이고, 낮은 소리인데 무겁지 않다. 물소리. 블라인드 커튼이 펄럭이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소리를 담다 보면 처음의 그 두드림이 다시 돌아온다. 1악장의 모든 길이 아이러니다. 애초에 시선조차 내어주지 않던 사람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반추했던 시간들이 서서히 잊혀진다.

 

 

II. Allegretto (조금 빠르게)

리듬을 불러오며 곡이 시작된다. 한층 쨍해진 비올라가 위아래를 오가고, 색감도 생기 있게 살아난다. 확실히 속도감이 붙었다. 생기도 돋는다. 다만 생동감이 넘쳐흐르기보다는—워낙 심지가 깊은 사람이 겉의 소리만 일부러 밝혀둔 듯한 인상이다. 활이 그어질 때마다, 그 소리를 듣고, 스스로 판단한 뒤에 다시 꺼내 보이는 사람. 그 과정을 고요히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1악장에 비하면 거의 재즈다. 불규칙적이고, 조금은 삐그덕거리는 기색도 있다. 54:00를 보시라. 현악기 연주가가 나무 위에서 칼을 가는 듯한 광경이 펼쳐진다. 정해진 영역 안에서 높게 타오르되,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닿기 어려운 중간 영역에서 청중의 집중을 끌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생각해보라. 이런 정적이고 구조가 확실한 흐름 속에서, 청중의 인식에 명확히 각인되지 않은 곡일수록 연주가의 역량은 훨씬 중요해진다.


55:14는 반드시 응시하셔야 한다. 연주자의 표정과 그가 내어놓는 소리 속에서, 어떤 ‘의지’ 같은 것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한’을 품은, 굳건한 한 사람의 손짓처럼. (물론 쇼스타코비치는 “대체 무슨 소리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다 갑자기—밝게 노래한다. 어떻게 이런 곡조가 탄생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소리는 두텁고, 중간 음역의 활이 깊고 넓게 현 위를 오가며 만들어내는 흐름에는 질릴 틈이 없다. 처음 듣는 곡이었지만, 자연스레 깊이 집중하게 되었다. 작곡가가 애초에 지루할 틈을 허용하지 않은 듯하다. 긴 구간은 충분히 길게, 짧은 구간은 날렵하게—진중함과 밝음이 교차하며, 소리의 표현 영역을 다채롭고 치밀하게 구성해두었다.

 

위와 아래를 오가며 춤을 추다가, 어느새 가로로 넓은 파동을 그려낸다. 때로는 대각선으로 슉— 빠졌다가, 손가락으로 튕겨낸다. 이렇게 다채롭고 구간마다 표현이 다양하니 그냥 듣게 되는 것이다. 지금 뭘 귀에 담고 판단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저 들리는 걸 들리는 그대로 받아내고 있는 중이다.


생수병이고 나발이고, 지금, 내 앞에서 건반이 두들겨지고 있는데, 뭘 더 생각하겠는가. 뭔가 반복적인 것 같은데, 서로 다른 것 같기도 한 이 애매한 매력. 어쩌지…

 

 

III. Adagio (아주 느리게)

59:54를 꼭 한 번 목격해보시라. 첫 번째 그어냄—그 한 소리만 반복해서 열 번쯤 들어도 좋을 만큼, 아름답고 밀도 있는 소리가 난다. ‘아주 느리게’라는 지시어가 개별 음 하나하나 안에서도 충실히 살아 있다. 저음은 더 깊어지고, 소리는 더욱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어진다.


생각해보니, 왜 마지막 악장이 ‘아주 느리게’일까? 그 생각이 스치기도 전에 선명한 피치카토가 1:01:10에 맺어진다. 비올리스트의 자세와 피아니스트의 시선을 보시라. 뻗어내는 그 모양을 보니, 여기가 어디인지 감이 왔다. 아무래도 쇼스타코비치의 장례 이후의 시간 같다. 이 곡을 완성시킨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 곡이 마지막이 될 거란 예감을 했을까?


내가 아는 곡들은 대부분, 그만의 장난기와 비극 속에서도 살아남는 음악적 다양성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 비올라 소나타 전 악장, 특히 이 3악장은 모든 기교가 사라진다. 긋는 자와 받는 자, 두드리는 자와 내뱉는 이만 존재한다. 정돈의 시간이다.


구태여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제 안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나 이렇게 살다 갔음’을 소리 내는 1:03:42. 여한이 없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삐걱대며 우는 사람의 얼굴이다. 현대 음악 작곡가들은 이렇게 솔직한 데 있어서 거리낌이 없다. 조금도 포장할 줄 모른다.


애초에 이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1:05:35. 아베 마리아가 떠오른다. 서서히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겠다. 사람이 태어나 무로 돌아가고, 재가 되는데 여러 감정이 필요한가. 그냥, 가라앉는 시간일 뿐이다. 천천히—아주 느리게—. 클래식을 듣는 이유 중 하나가 1:06:28에 담겨 있다. 소리와 눈을 맞춰보시라.


뭔가 검고 어둑한 것이 드리워져 있으나, 애원하지도 닦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의지 자체를 놓은 것도 아니다. 그저 흑백 필터로 얼룩진 인생 전반을 멍하니 내다보는 안경 하나가 그려질 뿐이다. 마음이 지저분한 사람이 이 곡을 들었을 때, 뭔가 긴 청소기 하나가 내 안을 깊게 쓸고 지나간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사람은 가끔 쓸데없는 생각으로 하루와 이틀, 그리고 매일을 소비한다. 그보다 더한 자극으로 잡념을 덮어야 한다. 무언가를 직접 누리고, 맛을 봐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부 자극을 잊게 할 진동과 가까운 외부의 것으로 요란한 것들로 덮는 것이다. 연주가들은 그저 자신의 일을 행할 뿐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사색하고, 상념을 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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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1:10:00을 보시라. 제 일도 아니면서, 같이 흐느껴준다. 다 잊으라고 거의 제사를 지내준다. 이쯤 되면 클래식 공연을 보러 온 건지, 잡념을 잊게 해주는 클리닉에 온 건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치닫으며 다가온다. 서사를 이끌어오는 강한 흐름이 아니라, 울음의 세기를 짙게 해가는 것이다.


실내악이지 않은가. 밖으로 이야기를 퍼나르는 게 아니라, 내 안으로 더 깊숙이 내려앉는 길이다. 아주 얇은 실낱 같은 것이 나란히—피아노 건반과 발을 맞춘다. 흘려낸 것이 이제는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 아주 가냘프고 만지기도 무서울 만큼 연한 바람결이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피아노가 함께 되뇌어준다. 참, 깊숙하게도 함께해주는 두 분이다.


슬픔 앞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어른들의 소리 같기도 하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릴 수도 있는데, 이 순간에 행해야 할 것에 집중해서 담담히—악기 하나를 들어내어 사람들 앞에 선 사람들. 모두를 대신해 울어주고, 안식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들. 이 이별 안에서도 서정성을 길고 차분히 담아낼 수 있는.


모든 악장이 ‘나 고하노니’였다. 김세준 비올리스트가 활을 아주 천천히 현 위에서 오르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온다. 소리가 아주 여리고, 또 여려지는 사이에 왼손을 무겁게 내려놓고, 악기를 들어낸 채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공연장에서 들었을 땐, 비올라가 이런 소리를 내는 악기구나—소개받는 느낌이었는데, 되짚어보니 쇼스타코비치를 떠나보내는 고요한 장송곡이었다. 아—이런 악기구나. 똑같은 한 문장인데, 그 무게감이 달라졌다.


비올라를 지나온 뒤, 선풍기 앞에 놓인 태블릿을 흘끗 봤다. 물기 가득했던 화면은 어느새 윤기가 사라져 있었다. 비올라가 그것까지 함께 말려준 걸까. (크크) 흑연 같은 소리로 천천히, 또 깊숙이 마음을 다듬고 나니—이제는 내게 ‘기쁨’이었던 피아노 5중주를 마주할 준비가 된 것 같다.

 

 

 

4. 피아노 5중주 G단조, Op.57 – 유다윤, 임동민(Violin), 이해수(Viola), 윤설(Cello), 김송현(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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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피아노 5중주 57번이 마냥 희망찬 곡은 아니다. 쇼스타코비치가 어떤 시대에 살던 작곡가인가. 20세기 소련을 대표하는 음악가이지만, 스탈린 정권하에서 강력한 검열과 억압 속에 창작을 이어간 사람이었다. 체제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자신의 진짜 감정을 숨기지 않고 구석구석 드러내는 사람. 마냥 밝고 명랑해 보여도, 그 기저 아래엔 냉소와 슬픔이 곳곳에 서려 있다.


그래서 이 곡을 듣기 전엔, 분명 기분이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좋은 곡을 실연으로 들으면, 마음을 글로 토해내기 전까진 감정이 버거울 때가 많지 않던가. 그래서 왠지—5악장이 끝날 즈음엔 멍하겠거니 했는데, 웬걸. 작곡가의 슬픈 비하인드는 둘째치고, 그날 공연장에 도착했던 30일의 나는 슬픔을 느끼기엔 너-무 신나 있었다.


24일에 인상적인 연주를 들려줬던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와 김송현 피아니스트가 오늘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대됐는데, 공연 전날 인스타그램에서 5중주 연습 영상을 목격하고 나니—마음은 더 이상 비극을 담기엔 너무 들떠 있었다. (둥둥) 마침 비올라로 피로감을 말끔히 덜어냈으니, 이제는 마음 편히 피아노 5중주를 회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눈물 자국, 에코백, 손선풍기까지 모두 말라버린 오늘. 이제는 나만의 ‘행복’을 받아들일 차례다.

 


I. Prelude – Lento (느리게)

말은 ‘행복’이라 했지만, 피아니스트의 첫 시작은 마냥 웃으면서 지켜볼 수 없는 기색이었다. 유리창을 주먹으로 내려쳐 파편이 흩어졌는데, 해맑게 웃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신났던 것 같지만) 이후 첼로가 서정성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제1바이올린이 그 흐름에 응답하고, 동시에 파도를 중앙으로 밀어 넣는다. 내가 이 합을 중앙에서 지켜봤다니~~ (너무 좋아) 맨 앞자리에 앉지는 못했지만, 중앙 정면 자리였으니 충분히 좋았다. 


소리를 나눠 분석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인상으로 남는 1악장이었다. 딜레마와 검붉은 장밋빛을 망토 자락 안에 감싸 쥔 듯한 곡. 그러니 꽃잎이 어땠느니, 잎사귀가 어땠느니—말로 풀어내기엔 고혹성이 너무 깊었다. 그냥 듣다 보면 떠오른다. 데킬라, 포도주, 매트 립스틱.

 

연주가들은 보통 이런 실내악 공연에서 검은색 의상으로 통일한다. 가끔 악세서리나 작은 포인트들이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이긴 하지만—이처럼 농후하고 검은빛의 서사가 무대 위에 매혹적으로 펼쳐질 때는, 오히려 단정한 검은 의상 하나와 네 대의 서로 다른 나뭇빛 악기, 그리고 피아노 뚜껑에 어리는 미세한 빛의 결이 더 깊은 농염함을 만들어낸다.


세기가 짙어진다. 무작정 한 갈래로 뭉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흐름을 충분히 타오르게 하다가 마지막 즈음에야 고요히 합쳐지는 선이 있다. 피아노가 다시 유리알을 차갑게 드러내면, 현악기는 보다 아래에서 악보를 휩쓸듯 지나가 준다. 분명 흰 배경 위에 음표로만 보았을 때는 이 정도의 농도는 없었던 것 같은데—이래서 악보든, 악기든 사람 손에 타올려져야 한다.

 

 

II. Fugue – Adagio (아주 느리게)

제1바이올린이 나지막이, 홀로 얇고 날카롭게 소리를 드높이는 순간이 있다. 제2바이올린은 그보다 뭉툭하고 넓게—아까의 비올라를 떠올리게 할 정도의—소리로 받쳐내고, 그림자를 그려낸다. 유다윤 바이올리니스트의 황갈빛과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카라멜빛 악기가 눈에 담긴다.


첼로가 가장 밑선을 깔아주고, 이젠 비올라까지 다가와 네 가지 현악기가 서로 다른 허공에서 빈 선을 그어낸다. 방향은 어떠한가. 흐르는 것도, 내려앉는 것도 아니고, 제자리에 서서 무언가를 뚝—뚝—떨궈낼 즈음, 피아노의 아랫소리가 고요히 네 악기 아래 사이를 파고들더니, 하나로 모여들어 사그라든다.


피아노의 나지막한 발걸음이 김송현의 손 안에서 고요히 내딛는다. 어찌나 고고하게 누르는지. 이제는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선창이다. 나 한 번, 너 한 번, 또 한 번. 이렇게 한 번, 몇 번을 소리로 주고 받고 노닐다 보면, 제1바이올린이 아까의 그 높은 선을 다시 세우고, 첼로는 진동을 유도한다.


한 명이라도 빠지면 어떻게 될지 감도 안 오는 연속과 이어짐이다. 동시에 함께 흐름을 주도하며 각자 흐느낄 수 있는 위치에 똑바로 서서 ‘하나’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서로를 향하고 있다기보다, 관중석 쪽으로 5개의 직선이 그어지는 느낌이다.


찢어지고, 깨지는 12:02. 쇼스타코비치라면 이래야지. 완벽하고 듣기 좋은 음만 가득한 곳이 클래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참 곤란하다. 이 안엔 인간적이고 내밀한 불편함을 미묘하고 아름답게 그려내는 음표가 가득하다. 피아노가 아주 강한 타건으로 내려앉고, 그 충격에 첼로가 파편 사이에 주저앉는다.


두 바이올린은 서로 다르게 눈물 자국을 닦아내는 길이다. 누구는 고개를 들어내고, 누구는 오른쪽으로 천천히 결을 내어준다. 머물렀던 건반은 다시 옆으로, 아래로, 대각선으로—현악기를 메워낸다. 활 네 개가 이렇게 놓여 있으니, 가만히 둘 시간이 없다.


울지 마라. 흐느끼지 마라. 울어라. 토해내라. 위로하는 건지, 같이 울어주는 건지. 위로의 갈피를 잡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깊다. 그러다 왜—또 서정적인 아픔을 그려내는 15:49인가. 종잡을 수가 없다. 웃을 거면 웃지, 왜 울면서 입꼬리를 드러내는지 모르겠다. 괜히 마음을 아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피아노가 천천히 내려앉는 길목에 궁... 하고 신호를 주면, 16:55. 네 대의 현악이 모여든다. 다른 건 몰라도, 이 현과 현, 활과 활이 한순간에 모여든 소리는 귀에 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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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III. Scherzo – Allegretto (조금 빠르게)

사회에 순응하면서도 찰리 채플린처럼 웃어내 보이는 게 이 작곡가다. 단숨에 쨍쨍—함이 마룻바닥을 짱짱—하게 장악한다. 뚱땅거리며, 똥똥거리며, 합을 맞췄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가, 튀어오르다가, 지그재그—서로 다른 세기로 활을 그어버리는 사람들이다. 이 광기어리며 재간스러운 발걸음을 어째야 하는가? (어쩌긴 신나 죽겠다!)


둥땅거리면서 재미나게, 또 텐션 있게 긁어버린다! 이 정도면 마구잡이로 내달릴 것 같은데, ‘조금 빠르게’만 간다. (미치겠네) 더 빨리 뛸 수 있는 걸 아는데, 정말 착—착—착—착—하면서 흐름만 유도한다. 건반의 물방울과 현의 리본이 춤을 추다가도, 20:20. 몇 가지 소리가 튀어나오는지 목격하시라. 튕겨내고, 긋고, 날아오르고, 선을 내밀고.


연주가들이 한 번씩 웃음을 지을 때마다 나도 방긋방긋—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 이 곡이 그렇게까지 행복한 곡조도 아닌데 왜 이렇게 즐거운가? (이상한 사람 되기) 아니, 합이 너무 잘 맞잖아. 행복하잖아. 이 악장 끝나고 솔직히 박수 한 번 치고 싶었다. (욕 한 번 먹어봐?) 아마 발레였으면 ‘꺄악—!’ 한번 했을거다.

 

 

IV. Intermezzo – Lento (느리게)

방금 신이 났는데, 쇼스타코비치가 명상 안으로 들여놓았다. (너무해) 이럴 땐 가만히 바이올린 하나를 붙잡고 쳐다봐야 한다. (지긋이…) 첼로가 밑바닥을 둥—둥—깔아주면, 제1바이올린이 높게 홀로 날기 시작한다. 되게 정돈된, 얇은 길이다.


때때로 가만히 있는 바이올린에도 시선을 두었다. 언제 또 이렇게 연주가의 악기를 눈앞에서 마주하겠나 싶어서, 실컷 눈을 반짝였다. (이쁘다!) 약간 자리를 잘못 잡아서 앞 사람의 시야에 연주가분들이 잘 안 보였던 탓에, 이 느린 선율 안에서 나 혼자 까꿍 놀이하느라 바빴다. (왼쪽을 보면 얼굴만 보이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손이랑 악기만 보인다!!!)


그러다 제2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제외한 악기들이 모여들었고, 나도 동행 옆으로 살짝 몸을 기울여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소리는 고요히 가라앉았는데, 나는 너무 신이 나 있어서 그 고요함 위를 마음만 동동—띄우고 있었다. (피아노 5중주 너무 재밌다… 하면서)


피아노를 어떻게 저렇게 가볍게 누를까? 현에서 이명을 닮은, 얇은 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피아노가 뚝—뚝—뚝—뚝—내려놓는 소리를 들어보시라. 애태우는 소리들이 이곳저곳에 있다. 가냘프게 우는 마음이 들리는가? 서서히 지체되는 듯, 높게—높게—제1바이올린이 이별을 고한다.

 

 

V. Finale – Allegretto (조금 빠르게)

틈을 주지 않고, 피아노가 정말 ‘조금 빠르게’ 생동감을 불러온다. 여기서 갑자기 목가적이라고? (신나네) 기분 좋은 회오리가 있다. 모여들었다 당겼다가, 멀어졌다가! 예뻤다가~ 우아했다가, 고즈넉하고— (꺄) 너무 재밌다. 제1바이올린이 자기 영역에서 높게 타올랐다가, 나머지 현악기들이 파도처럼 웅얼이며 다가온다. (이 글을 쓰면서도 들뜨기 시작했다)


30:34! 이제는 신나고 짧게 춤을 추는 시간이다. 현악기가 다 함께 ‘쨍’해지는 순간, 피아노는 ‘햇님’을 데려온다. 해 말고, 동화책에 나오는 그 햇님이다! 이 기분 좋은 ‘함께’의 소리를 들어보셔야 한다. 완벽한 팀플레이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서서히 타오르는 감정선이 있고, 피아노가 주도해준다. 네 개의 활이 재간스럽게 따라다닌다. 피치카토 너무 좋다~.


그러다가 31:35(!) 화면 속 세 연주가의 동작을 보시라. 저 일치감! 활과 소리를 들이켜내고, 다 같이 차가워지는 이 얼음냉골 같은 화음이 있다. (제발 들어줘) 냉면 왜 먹냐. 쇼스타코비치 듣지... 다시, 아까 듣기 좋았던 회오리가 32:25에 온다. 현악기의 바람은 진짜 못 당하겠다. 동시에 몰고 오는 건 정말 반칙인 것 같다. 악기별로 음색은 그렇게 다른데, 하나로 합쳐졌을 땐 왜 그렇게 딱—맞아떨어지는지 신기하다...


...고 하기도 무섭게, 다시 날카롭게 불협의 음을 내기 시작하는 연주가들이다. 날카로운 소리를 딱 맞아떨어지게 내는 것도 능력이라는 걸 아는가? 잠시 딴 생각하다가, 마음속에 콕! 지정해놓은 그 부분이 슬며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멍하니 냐— 하고 구경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확— 그 지점이 나타나 당황했지만, 정신 붙잡고 귀를 집중시켰다.


34:35! 바로 여기다! 뭔가— 갑자기 소리의 흐름이 따뜻해지면서, 따뜻한 오렌지빛 태양이 그어진다. 아니, 연주가들도 웃어준다. (행복해~~~~) 그러다가 또 내밀한 소용돌이를 야금야금 몰고 들어오는데, 이쯤 되면 누워서 듣고 싶다. (진짜, 저 안 잘 수 있어요)


뭔가 전체 흐름은 조금 더 밝아졌는데, 사위는 고요해진 기분이 든다. 크게 영역을 차지하기보다는, 그어내는 것들을 절제해내며 차분히 결말로 향한다. 특히 36:07,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두 겹의 바람을 보시라. (꺄) 한두 번의 미소와 가벼운 손짓으로, 이 길이 조용히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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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5. 다시 7월 31일. 원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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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너—무 신난다! 에코백에 뭔가를 쏟았던가? 잊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까먹었다. 생수병? 이미 꾸깃꾸깃 접어 뻥—! 발로 차버렸다.


클래식 공연을 왜 보겠는가. 체력 부족에서 기인한 이 예민한 감정 덩어리를 수월하고도 유순하게 다뤄내기 위함 아니던가. 피아노 5중주와 비올라 소나타 덕분에 다시 기분이 한껏 들떠올랐다. 사람은 동경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취미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에 별게 있겠나. 눈 안에 별을 박기 위함이지. 


가방 안으로 물이 잔뜩 스며들고, 그 물기처럼 마음도 푹—내려앉았을 때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들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상쾌한 눈으로 좋아하는 것들에 시선을 가득 두는 것. 그러다 보면 어떤가. 지금처럼,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올 수 있지 않던가.


7월이 지나고, 어느새 8월이 되었다. 6월부터—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길게 기다려왔던 2025년의 줄라이 페스티벌이 막을 내렸다. 이번 한 달은 내게 어떤 줄라이였을까? 기쁨과 미소, 발견, 그리고 내려놓음의 즐거움을 배운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연주,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선을 맞출 수 있었던—그런 감사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음의 달이겠다.


처음에 뭐라 했더라? 살다 보면 막을 수 없는 흐름이 있다고 했던가? 그래, 맞다—쇼스타코비치의 비올라와 피아노 5중주가, 내 안의 동그란 원형을 끝내 지켜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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