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사람이 책상 앞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떠한 사실도 모른 채 우리는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포맷변환][크기변환]룩백표지.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31014420_txhuaery.jpg)
만화 <룩 백>은 일본의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작품 중 하나로, 그의 대표작에는 ’파이어 펀치’, ‘체인소 맨’, ‘안녕, 에리’ 등이 있다. 그의 존재를 체인소 맨을 통해 알게 된 나에게 후지모토 타츠키는 좀처럼 알 수 없는 세계였다. 쉽사리 무어라 정의하기는 어려운 그런 사람. 타츠키가 그려내는 이야기를 기어코 하나의 단어로 나타내야 한다면 그 명암은 어둠에 가깝다. 룩 백을 집어 든 그날, 동네 서점에서 마주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서로의 등을 바라보며 각자의 꿈을 키워 나간다면, 우리는 그걸 사랑과 우정이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문득 궁금해졌다. 비극과도 같은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보여주는 사랑, 그리고 우정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내가 저들의 등을 바라보게 된 것은 바로 그 물음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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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룩 백>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함께
만화를 좋아하는 소녀 후지노는 초등학교의 학년 신문에 매주 네컷 만화를 투고한다. 그의 만화는 친구들로부터 언제나 호평받으며, 후지노 역시도 자신의 그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던 중 후지노의 네 컷 만화 옆에 쿄토모의 만화도 함께 실리게 된다. 쿄토모는 학교에 나오지 않는 동갑내기 학생으로, 배경을 묘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나란히 배치된 두 만화를 본 후지노는 자신의 그림 실력이 더 나아갈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며 쉴 새 없이 그림을 공부하고, 또 그린다. 2년이 흐른 뒤 학년 신문을 펼친다. 하지만 그가 보기엔 여전히 쿄토모의 실력이 더 우수하다. 몰아치는 박탈감 혹은 허무감, 그런 감정을 마주한 후지노는 결국 그림을 그만두겠다 마음 먹고 더 이상 만화를 투고하지 않는다.
![[크기변환]룩백.pn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31014015_izhlzvas.png)
졸업식 날 역시 학교에 나오지 않은 쿄토모, 선생님은 쿄토모의 졸업증서를 전달해달라고 후지노에게 부탁한다. 그렇게 서로를 만나게 되고, 쿄토모가 후지노의 만화를 애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알게 된 후지노는 비 사이를 가로질러 집으로 향한다. 정확히는 책상 앞으로, 만화를 사랑하던 자신의 마음 앞으로. 그는 비 맞은 몸을 추스 틈 없이 그림을 그린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은둔형 외톨이 쿄토모는 후지노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간다. 함께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용기가 되어 닿은 것이다. 언젠가 인간은 타자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넓혀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저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 말이 스쳐 갔다. 쿄토모에게 후지노는 밖으로 향해 볼 결심을, 후지노에게 쿄토모는 다시금 그림의 세상에 발 들일 결심이 되어주었다. 이렇듯 둘은 서로의 여린 구석을 어루만지며 한 걸음씩 나아간다.
각자
‘후지노 쿄’. 둘의 이름을 결합한 활동명이다. 중학생이 된 그들은 후지노 쿄라는 이름으로 함께 만화를 투고한다. 편집자의 칭찬을 한껏 받으며, 점차 이곳저곳에 자신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 끝에 정기 연재 제의까지 받게 된다.
그쯤 쿄토모는 ‘배경’의 영역에 더욱 빠진다. 배경 미술 서적을 볼 때 쿄토모의 눈동자는 찬란히 일렁인다. 오직 흑백으로 이루어진 만화임에도 배경의 세계와 맞닿은 그의 볼은 여린 살굿빛을 띄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정이란 나란히 걷다가도 어느 날엔 다른 길 위에 있기도 하는 관계. 둘은 함께 그림 그리는 순간을 사랑했고, 동시에 다른 형태의 것을 사랑했다. 후지노에게 그 대상은 만화였으며 쿄토모에게는 배경이었다. 10대의 끝자락에서 쿄토모는 말한다. 미술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그러니 더는 같이 만화를 연재할 수 없을 거라고. 후지노는 쿄토모에게 괜스레 모진 말들을 뱉는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슬퍼 보인다. 나는 그 얼굴이 단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함께하고 싶어서, 변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 마음을 돌려 보려 짓궂은 말을 하는 사람의 표정. 뺨에 살포시 맺힌 땀이 후지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애도
홀로 그림을 그리는 후지노. 그는 어느 날 한 가지 소식을 접하게 된다. 바로 야마가타 미술 대학의 교내에서 어느 남성이 학생들이 자신의 작품을 베꼈다며 흉기로 난동을 부린 사건이 발생했고, 그리고 피해자 중 한 명이 해당 학교에 진학 중이었던 쿄토모라는 것이다.
남겨진 후지노는 후회한다. 쿄토모에게 졸업증서를 전하러 간 날 그의 방문 틈 사이로 자신이 그린 네컷만화가 흘러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무언가가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상상하며. 그를 세상으로 끌어낸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다.
이들의 이야기를 볼 때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건이 존재한다. 2019년 일본에서 발생한 쿄애니 제1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방화 사건이다. 피의자 아오바 신지는 애니메이션 회사 ‘교토 애니메이션’이 자신의 소설을 표절했다며 스튜디오에 방화를 저질렀다. 일종의 테러였던 참사는 수많은 피해자들로, 회사의 막대한 손실로 이어졌다.
룩 백과 쿄애니 방화 사건은 상당히 겹쳐 보인다. 작가는 왜 이러한 선택을 했을까. 앞서 말했듯 사건 이후 후지노는 모든 원인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린다. 시간의 축을 앞으로 돌리며 가정하고 또, 후회한다. 모두가 익히 아는 남겨진 이들의 습성처럼. 만약을 떠올리며 대상이 존재하는 순간들을 상상해 보는 일. 더불어 밀려오는 원망과 책망. 그 모든 것들은 남겨진 자들에게로 향한다.
룩 백은 보여준다. 만약 그날 둘이 마주치지 않더라도 쿄토모는 미술 대학에 간다는 것을. 타자가 아닌 본인의 선택으로 말이다. 그러니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묻지 말라고. 작품은 비극의 원인이 모두 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들의 자책을 살포시 끌어안는다.
동시에 그는 평행세계를 통해 또 다른 곳에서의 안녕과 평안을 바란다. 쿄토모의 방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가 그린 네컷 만화가 문틈을 넘나들며 세계는 교차한다. 현실 그 너머에서는 미술 대학에 입학해 괴한을 만난 쿄모토를 후지노가 구해주고 함께 만화를 그릴 순간을 약속한다. 그곳에서나마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 새로운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 이것은 타츠키의 애도이다.
등 뒤를 봐
후지노 넌 왜 만화를 그려?
후지노가 몇 번을 휘청이고도 만화를 그리던 이유, 후지노의 등 너머에 그 이유가 존재한다. ‘룩 백(look back)’은 뜻은 ‘회고’ 혹은 ‘뒤돌아보는’이다.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작품은 ‘뒤’와 연관성을 지닌다.
작품 속에서 후지노는 늘 책상에 앉아 있으며 그 뒤에 쿄토모가 앉아 있는 구도를 취한다. 쿄토모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방문 앞에서 절망하던 후지노는 틈새로 흘러 들어온 네 컷 만화를 집어 든다. 네컷 만화의 제목은 ‘등 뒤를 봐’. 후지노는 등진 문을 돌아보고, 들어간다. 책장에는 자신의 만화가, 옷걸이에는 자신이 사인해준 옷이 있다. 이를 본 후지노는 그제야 등 뒤를 돌아본다. 자신의 만화를 읽을 때 떠오르는 쿄토모의 표정을 생각하며. 그가 몇 번이고 만화를 그리는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둘은 서로의 등을 보며 나아간다. 그건 때로는 질투심 혹은 존경심, 사랑과 같은 감정을 동반한다. 우리가 추앙하는 대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마음처럼.
문득 대학의 교지편집위원회에서 함께 글을 쓰던, 부럽기도 하고 동시에 닮고 싶었던 나의 친구들이 떠오른다. 한데 엉켜 사유하고 서로의 글을 읽는 순간들을 사랑했기에에, 나는 그래서 계속 글을 쓴다.
뒤를 돌아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 룩 백은 바로 그 존재를 바라본다. 후지노를 추동하는 존재이자 계속 행위하게 하는 존재. 그림을 그만두려 하다가도 후지노는 쿄토모로 인해 다시금 일어선다. 쿄토모가 세상을 뜨게 된 후에도 그를 떠올리며 결국 다시 책상 앞으로 향한다. 그럼에도 살아가리라 몸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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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모토 타츠키의 작품은 어둠과도 닮아 있다. 다만 그는 그런 명암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죽음과 절망, 이러한 비극의 무대 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그려낸다. 룩 백은 우정과 사랑 이야기 그 이상을 넘어 애도이자 재건이다. 타츠키의 세계가 캄캄하다고 확신하던 나는 룩 백 속에서 빛을 목도했다. 그 빛은 내게 말한다. 그러니 놓지 말자고, 살아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