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나는 평생 주인공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노베첸토> 관람이 끝난 후 공연장을 나서는 순간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다. 절정 단계에서 주인공이 내린 선택은 모름지기 관객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내가 책이나 공연을 접할 때 늘 마음속에 갖고 있는 법칙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 연극을 보고 난 후 나는 ‘주인공 이해하기’를 멈췄다. 집으로 돌아오는 3호선 지하철 안에서 나는 함부로 주인공인 노베첸토의 선택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어쩌면 그에게 폭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친구가 나에게 발레를 그만둘 거라고 말했다. 자신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여섯 살 시절부터 발레만 해와서 이제는 발레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그런데 이제는 놓아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그는 발레를 그만두고 대부분의 학생들처럼 대입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했다. 처음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 주는 것이 최선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평생 해 온 무언가를 포기하면서까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벼운 위로나 용기의 말은 건네고 싶지 않았다. 친구로서 통상적으로 하는 말을 피하고 피하다 보니까 결국 내가 뱉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살면서 나아가본 적 없는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할지, 또 어느 정도의 두려움이 밀려올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다.
평생을 배 위에서 지냈지만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바다 너머의 육지를, 그 육지 위에서 뿌리내린 채 살아가는 도시를, 뒷골목 늙은 시인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가난한 이방인의 헤진 코트 속 가족 사진을 잘 알고 있다. 젤리 롤 모턴과의 피아노 연주 대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지닌 세계를 존중하고 그 세계의 크기를 서로 비교하지 않는 것. 이러한 노베첸토만의 정신적 신념은 그에게 여유로운 태도와 단단한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여유로움과 평온함으로부터 비롯된 그의 음악적 역량은 가히 천사가 탐낼 만큼의 엄청난 재능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난 후에도 노베첸토는 한평생 자신이 몸을 실은 배 위에서 살아가기를 택한다. 정확히는 스스로 그 배에서 생을 마감하기로 한다. 곧 폭파할 다이너마이트 위에 걸터앉은 노베첸토는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였던 팀 투니에게 고백하듯 본인이 살아온 삶을 털어놓는다. 극의 후반부, 노베첸토가 사후 세계 속 천사와 대면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천사는 그에게 유감스럽게도 폭발로 인해 그의 한쪽 팔이 사라졌으며 남은 건 흑인의 오른팔밖에 없다고 말한다. 결국 노베첸토는 천국에서의 남은 생을 오른팔 두 개로 살아가기를 택한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렴풋한 미소가 존재한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갖고 있는 욕망을 떼어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갓난아기 시절 홀로 갑판 위에 버려졌을 때,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던 대니 부드먼이 급작스레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던 순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중 노베첸토가 가장 마지막으로 놓아야 했던 욕망은 바로 피아노다. 그의 사라진 왼팔은 피아노를 향한 그의 마지막 욕망을 상징한다. 가장 원했던, 그렇기에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피아노는 결국 그가 사후 세계에 다다라서야 떠나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주인공 함부로 이해하기’를 멈췄다. 한 사람의 단편적인 부분만으로 그의 지난 일생을 대충 가늠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한 생각을 지웠다. 태어날 때부터 발붙일 수 있는 땅 위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고작해야 그의 바다 위 수평선 길이를 가늠해 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나는 관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선택을 이해하려 부단히 애썼다. 노베첸토를 받아들이기 위해 힘들이는 과정을 멈추니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노베첸토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그의 결정만큼은 존중하고 지지할 준비가 되어있다.
‘내가 너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영원한 너의 친구야.’
내 친구가 발레를 그만두겠다고 고백한 다음 날, 나는 그 아이에게 문자로 이렇게 보냈다. 오랜만에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 몰랐어. 세상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무서운지. 피아노를 생각해 봐. 건반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 우린 모두 그게 88개라는 걸 알아. 그런 건 무섭지 않아. 무서운 건 세상이야. 건반은 무한한 게 아니야. 무한한 건 그 건반으로 만들어내는 음악이지. 건반은 88개고 음악은 무한해. 나 이런 게 좋아. 내가 내리려던 그 계단에 섰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건 수백만 개의 건반이었어. 너무 많아서 뭘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 같은 수백만 개 수십억 개의 건반. 진실은 이거야. 끝이 보이지 않는 건반. 건반이 무한하다는 건 그 건반으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 없다는 거야. 처음부터 악기를 잘못 선택한 거지. 난 그걸로 연주 못해. 그건 신이나 가능한 악기야. 난 이 배에서 태어났어. 물론 여기에서도 세상은 흘러가. 다만, 딱 2,000명만큼의 세상이지. 물론 여기에도 욕망은 있어. 하지만 그건 선미와 뱃머리 그 사이에서나 가능한 욕망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 난 이 배에서 유한한 건반으로 행복을 연주했어. 내가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이야. 나 이 배에서 내리지 않을 거야. 친구, 날 이해해줘. 마법을 걸면서 말이야. 이건 광기가 아니야. 굶주린 사자처럼 영민한 거라고. 아주 세심한 작업이야. 기하학이지. 난 그렇게 내 인생에게서 모든 욕망들을 떼어낸 거야. 난 불행을 무장해제했어. 친구, 자네에게 좋은 이야기가 있고 그걸 들려줄 누군가가 있다는 건 자네에게 아직 희망이 있는 거야. 이제 그만 돌아가. 자네 발밑에 있는 거 그거 진짜 다이너마이트야. 이제 어서 돌아가. 내 이야기는 끝났어. 이제 정말 끝이야."] - 연극 <노베첸토> 대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