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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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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다채로운 이야기들의 뭉치다. 하나의 끝을 잡고 따라가면 반드시 다른 어딘가에 묶이고 얽혀있는, 실타래 같은 이야기의 덩어리다. 그러니까 나의 삶은 언제 어디선가 연결된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 나의 이야기는 당신의 이야기와 얽히고 연결되고 퍼져나간다. 하나의 삶이 끝났을 때, 끝난 자의 이야기가 삶보다 더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은 그런 이유다.


김상혁의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문학동네, 2016)를 읽는다.

 

 

나는 이야기 속에서 사랑한다. 좋았다고 말하거나 좋은 것에 관해 말하거나. 나는 이야기 속에서 시작한다. 어제 꿈이 그랬다, 오늘 예감이 이랬다, 머릿속에서 우리에게 허다한 행운이 따랐다. 쏟아지는 이야기의 기쁨이 여름의 나무를 높였다, 겨울의 새를 낮추었다, 겨우 언덕을 오른 우리에게 하늘이 좁아지고 있었다.


- 「나는 이야기 속에서」 부분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사랑한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우리 상상 속에서 사랑의 감정을 엮어내는 이야기의 일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나는 이야기 속에서 사랑한다”는 고백은 현실에서는 자꾸만 실패하는 사랑에 대해 내뱉는 비관이 아니다. 파편처럼 부유하는 막연한 ‘좋음’의 생각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시킬 때, 그 사랑은 형태를 갖춘 “이야기 속에서 시작”하게 되는 것. “쏟아지는 이야기”는 나무의 키를 높이고 새가 날아가는 고도를 낮추어 허공을 좁히는 일처럼 당신과 나 사이의 막막한 거리를 좁힌다. 좁아진 마음의 허공에서 막연했던 사랑의 “예감”은 성취될 “행운”으로 압착된다.


사랑을 꿈꾸고 결국 성취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분명한 기쁨의 이야기다. 그것은 언젠가 우리가 비슷하게 경험한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처럼 누군가 쓴 기쁨의 이야기도 분명한 이야기의 하나라서 다른 삶과 엉키고 엮인다. 다만 보편적인 것만 같은 사랑의 이야기는 그것을 소중히 써내려간 그 자신만의 것이기도 해서, 누구도 온전히 공유할 수 없는 고유한 내밀함을 한계처럼 간직한 채 옮겨 적힌다.

 

 

만일 기쁨을 말한다면 그건 사람의 기쁨이겠지. 기쁜 사람이 매일 찾아가 두 팔로 나무를 안아주었다. 나무는 자라 숲이 되고, 숲이 끝없이 퍼져 해안까지 닿았다. 그렇대도 그것이 나무의 기쁨, 숲의, 바다의 기쁨은 아닌 것이다.


- 「기쁨의 왕」 부분

 

 

우선 기쁨의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전제다. 예컨대 나무가 자라고 퍼져서 숲을 이루는 과정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전해질 기쁜 이야기이지만, 정작 나무도 숲도 바다도 그런 기쁨을 느낄 수는 없다는 것.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며 자연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시인의 건조한 시선은 언뜻 냉정하게 보인다. 그러나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차이를 주창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와 개별자 사이의 절대적 간극까지 나아가기 위해 이렇게 쓴다.

 

 

먹는 기쁨, 보는 기쁨, 생각하는 기쁨.

영혼의 기쁨 같은 건 없다.

그렇대도 기쁜 영혼 같은 건 있었으면 좋겠다.


기쁜 남자가 가족을 위해 매년 울타리를 칠하였다. 기쁜 아내가 기쁜 아이를 낳았다. 그들의 행운이 이웃을 웃게 만들었다. 그렇대도 이불을 뒤집어쓴 각자의 행복한 꿈속으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인간의 (증명되지 않은) 공통 조건이 있다면 그건 ‘영혼’의 존재일 텐데, 시인은 그 공통점마저 애써 부정한다. “먹는 기쁨, 보는 기쁨, 생각하는 기쁨. / 영혼의 기쁨 같은 건 없다”고. 만약 하나의 개별자에서 다른 개별자로 온전히 전이될 수 있는 기쁨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 최대 범위는 하나의 “이불을 뒤집어쓴”, 말하자면 가족 단위 정도가 될 테다. 그 주변은 겨우 따라 웃을 수 있을 정도의 감각만을 공유할 뿐, “각자의 행복한 꿈속으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모두가 완전히 공유함으로써 단단하게 얽혀 결코 “깨지지 않는 기쁨 같은 건 없다”. 기쁨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다스리고 퍼뜨릴 수 있는 절대적 왕은 없다는 것. 만약 기쁨의 왕이 있다면 그것은 “기쁜 영혼이 돌아올 수 있”기를 기원하며 길을 다지고, “기쁜 물결”의 흐름이 널리 퍼지길 바라며 지켜보는 소망적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슬픔의 이야기는 어떨까. 슬프게도 슬픔은 더 널리, 더 충분하게 공유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나보다 슬픈 사람을 다섯이나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몽유병자, 주정꾼, 어린 자식을 둘이나 잃은 부인도 있어요 나는 그들을 다 병원에서 봤습니다 (중략)


병원에 와서 자기 생각을 찾고, 자기를 찾고, 결국 타인마저 고양시키는 그들은 하나같이 슬픔의 왕들이에요 되게 망쳐버린 부분이 있고 꼭 되찾고 싶은 생활이 있습니다.


너무 슬플 땐 무서운 게 없더라네요 아무래도 내겐 공포를 지나칠 수 잇는 슬픔 같은 건 없으니까, 내가 무언가를 말해도 되는 걸까, 나의 멀쩡한 집과 가족을 어떻게 설명할까


- 「슬픔의 왕」 부분

 

 

슬픈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찾은 병원에서 시인은 다른 환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시인은 그들의 슬픔이 자신보다 크다는, 막연하지만 분명 “나보다 슬픈 사람”일 거라는 확신에 도달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누군가 짊어진 슬픔의 정확한 질량은 알 수 없되, 슬픔의 상대적 무게는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다는 것. 기쁨은 타인과의 공유 범위에 분명한 한계가 있지만, 슬픔이라면 “결국 타인마저 고양”시킬 수 있을 정도로 한계를 자주 넘나든다. 기쁨은 왕이 없고, 슬픔은 “슬픔의 왕들” 여럿을 가진다. 어쩌면 인간의 이야기란 모두가 슬픈 왕이 되어 써내려간 역사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성실한 노예라네. 목화가 끝나고 옥수수가 끝난 땅에다 아내와 개를 먹일 고구마를 기르지. 주인은 고기가 필요하면 사냥을 떠난다네. 물론 가끔은 존의 아내에게 들어가기도 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끝이 없다네. 여자와 개가 도망치지 않는다면. 모든 마지막이 그렇듯, 모든 것과 함께 성과 집이 불타버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져버린 아주 오랜 시간


- 「인간의 유산」 부분

 

 

인간은 언제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이야기를 써왔다. 주인과 노예와 노예의 아내처럼 각자가 분리된 구획에 갇혀있을 때도 삶은 나눠 쓰였다. 들여다보면 무참한 서사이자, 그럼에도 기필코 살아남았기에 “끝이 없”이 전해질 것들이다. 기쁨은 각자의 영역에서 수없이 단절되고 슬픔은 타인의 영역을 허물고 공유되는 일의 반복. 우리는 오래도록 기억된 이야기들에 ‘유산’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쓰고 기억하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것은 쓰이고 엮이고 다시 쓰이면서 “매년 우리를 살찌우”거나, 아주 메마르게 할 것이다. 어쨌거나 살아가는 한 “다만 이야기가” 영원한 유산처럼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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