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질문하고자 한다.

 

당신이 가장 여운깊게 보았던 영화나 소설을 떠올려보라.

 

주인공들이 어쩐지 조금 이상하지는 않은가?

 

그들은 비일반적이다. 통상적인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가 쌓아온 견고한 '도덕', 사회적으로 암암리에 따르고 있는 '룰'들을 그들은 가감없이 해체시키고 도전장을 내민다.

 

그 중에서도 '사랑'에 집중하여서 본 글을 써보려고 한다. 조금은 이상한 사랑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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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서는 안돼. 나에게는 이미...


 

연인이 아닌, 연인이어서는 안되는 관계의 남녀. 그들 사이의 사랑을 표현하는 영화들이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해성과 노라,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래처럼.

 

그리고 그런 관계는 가끔 영화보다 더 영화같이, 현실에서도 벌어진다. 우리의 도덕을 비집어 들어온다. 영화배우와 이미 배우자가 있는 영화감독 사이의 추문처럼.

 

영화와 현실의 예시에는 차이가 보인다. 현실에서는 모두가 비난을 퍼붓는 반면, 영화에서는 그러한 그릇된 사랑을 아슬하고 아찔한 사랑으로 로맨티시즘화시킨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왜 우리는 예술이 그러한 관계를 다루는 것을 흥미로워할까?

 

예술이란 현실을 담되,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이면들을 고발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예술가는 도덕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많은 예술가들은 인간의 마음에 집중하여 여러 가지 뒤틀려버린 도덕과 그 기저의 욕망을 그들의 작품 속에서 분출시킨다.

 

그러니 곧이어 이어질 설명을 읽으실 때, 판단은 잠시 접어두시라. 도덕 이전의 원초를 들여다보자.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인 노라와 해준은 마지막 순간에 서로를 꼭 안아 준다. 그 포옹은 마지막 인사였다. '우리 둘 모두 우리가 서로를 사랑함을 알아. 그치만 이제 정말 안녕.' 그런 무언의 말을 하듯이 안는다.

 

결국 노라는 해준을 놓아준다. 해준이 떠나자마자 노라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확 터트린 채 현재의 배우자에게 가 안기어 무너지듯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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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게 최선인가?


 

여러분들은 저 장면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을지 궁금하다.

 

나는 이 장면을 영화관에서 보면서 참으로 애매한 감정을 느꼈다. 이것이 최선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라가 해준을 놓아주고, 펑펑 우는 노라를 현재의 배우자가 안아준다? 문장이 맞지 않는 느낌이다. 너무나도 이상하다.

 

곧 노라는 해준과 함께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도착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느끼는 순간 반대쪽 뇌에서는 '아니 그럼 원래 배우자는 도대체 무슨 죄야? 왜 그가 고통받아야 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맞다. 그 배우자는 이 이야기의 희생양이다. 노라와 해준의 사랑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설정된 철저한 장애물이자 방해꾼. 조연의 서러움이랄까. 그의 죄는 그저 이 영화에서 현남편 역할을 맡은 죄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노라도 그런 남편이 안쓰러웠던 걸까, 결국은 떠나지 않는다. 남편의 곁에 있기로 선택한다. 그러나 감정은 거짓을 말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낸다.

 

남편은 이때 무슨 감정이었을까? 분노했을까? 안도했을까? 아니면 스스로가 미웠을까?

 

남편을 떠나지 않는 선택도 결국은 남편을 괴롭게 하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쯤에서 판단을 포기하게 된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에 대한 생각의 고리를 끊고, 보이는 그대로 느끼기로한다. 노라가 해준에게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각적인 것에 집중한다. 노라가 해준을 결국 놓아주게 만든 이성이라는 것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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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없고, 입장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선역이자 악역이다.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나의 도덕이 달라진다.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나에게는 최악이었던 전 연인이 다음 사람에게는 한없이 다정하더라는 말들. 인간은 너무나 양면적이다. 양면으로는 다 표현되지 않을만큼 다면적이다. 그렇게 다양한 한 인간이, 또한 다양한 다른 인간들을 만나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

 

노라와 해준은 남편에게 악역이고 남편은 노라와 해준에게 악역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가 제공하는 시점을 따라가며 감상하기에, 감각적 몰입의 체험을 통해 노라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고 이는 곧 남편을 치우고 해준과 사랑하게 두고 싶은 욕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영화의 특수한 기능을 뺀 현실에서 그러한 토픽의 기사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노한다. 그들에게 이입하지 않는다. 내가 바람을 피기보다는 내가 나의 연인에게 바람을 맞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기에 예술의 모순적 도발 없이는 나의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이입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한 욕망에 우리는 늘 도덕을 겹치어 덧쓴다. 그 편이 쉽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다. 나는 도덕에 관해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영화가 비추는 감추고 싶은 욕망의 드러냄과 그 사이의 이입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에게 자신만의 감상이 생기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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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모순이다. 그를 담아내는 것이 곧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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