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고 무너지면 다시 쌓으면 된다. 그럼 녹는다면?
인생은 녹고 있는 걸 알아차리면 차릴수록 손 쓸 새도 없이 금세 녹아버린다. 그리고 이미 녹아버린 건 다 주워 담아 얼린다 해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
마침 여기, 주워 담으려 노력할수록 녹아버리지만 지지 않고 그런 인생에 맞서는 인물이 있다.
인스턴트 늪의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그보다 지금 가장 문제는 인생이 점점 녹고 있다는 것이다. 녹는다는 건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는 것.”
이 말의 당사자는 영화 <인스턴트 늪>의 주인공 ‘진초게 하나메’이다.
하나메는 '매일 아침 일어나 오늘은 무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무엇도 된 거 없이 밤에는 자고, 도시의 아침은 빠르지만 꾸덕꾸덕 코코아로 다소 늦은 아침을 맞이하고, 사회 속에서 갑자기 영업 당해서 군고구마를 먹고. 쓰레기를 흩뿌리고 치우고, 회사에 가서는 그만둘 생각을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회사에 뼈를 묻고, 무기력한 인생에서 차라리 정도를 벗어나고 싶지만 의외로 단조로워도 두루미에게 눈총을 받을 이유는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읽는 것만으로 숨이 차는 이런 두서 없는 나열을 벌써 이해했다면 이 영화는 굳이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중요한 건 하나메의 삶을 이제 겨우 3분의 2정도 나열했다는 것.
영화의 도입부는 구체적인 설명하나 없이 나열만으로 하나메의 인생을 간략하게 보여준다. 그 형식이 마치 하나메의 일기장을 보듯 친근해져서 순식간에 하나메와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통통 튀는 에너지가 넘치고 장난스러운 말투 뒤에 하나메는 무기력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그저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진짜야
하나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본가의 정원에서 어머니가 찾은 갓파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믿지 않고, 일로 심령 스팟을 촬영하러 나가서도 심령같은 건 없다고 큰소리친다.
그때부터였다. 녹고 있던 하나메의 인생이 ‘가파르게’ 녹기 시작했다. 다니던 잡지사는 폐간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호수에 빠져 의식을 잃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본인의 친아버지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된다. 인생이 녹다 못해 끝없는 늪으로 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메는 인생이 녹고 있다고 해서 같이 흘러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찾아가 본다. 혹여나 부자여서 인생이 급반전되기를 꿈꿨지만 하나메의 아버지 ‘진초게 노부로’는 골동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탐탁지 않았지만 자주 드나들며 하나메와 노부로는 친해진다. 와중에 ‘와카코’라는 여인이 골동품점에 찾아와 미래를 점지해주는 골동품 기계를 찾아달라고 한다. 와카코의 미모에 첫눈에 반한 노부로는 당장 찾아주겠다고 하지만, 진초메는 미래를 점지해주는 그런 기계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하나메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메, 넌 네가 믿는 것밖에 못 보니까 문제야. 인간은 믿을 수 없는 것도 믿어서 좋은 거라고. 불가사의한 일들을 인정해야 해.”
하지만 이런 아버지의 말에도 여전히 믿지 않는다는 고집을 피운다. 그리고 그 고집의 무게만큼 스스로 늪에 빠지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래서 아예 본인이 늪을 만들기로 결심하곤 믿을 수 없는 일을 경험하게 된다.
동시에 인간이 고집을 부리며 바라보는 세상은 한없이 작고, 자기 자신들을 깊숙한 ‘늪’으로 빠뜨려 버린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두에게 존재했'늪'
‘늪’은 땅바닥이 우묵하게 파여 늘 물이 괴인 진흙 바닥이다. 무언가 늪에 빠지면 다시 건져내기 어려워 왠지 무시무시해 보이기도 한다. 버리기는 쉽지만 버린다고 무언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저 해소되지 않고 쌓여 ‘늪’이 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인생도 서서히 잠식되어간다. 나도 모르는 새에 그 늪에 완전히 빠져버려 발이 묶인다.
하지만 늪의 진흙 바닥 밑에는 침수 식물이 자라나기도 한다. 스스로 늪을 만들며 쌓인 경험의 여정이 하나메에게는 침수 식물이었고 만든 늪에서 발견한 불가사의한 일은 새로운 돌파구로 작용했다.
늪은 하나메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저마다의 늪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제목에 왜 ‘늪’ 앞에 ‘인스턴트’가 붙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늪은 엄청난 것만 쌓여 만들어지는 게 아니란 사실이 나의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었다. 늪은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생에서 늘 즐거운 일만 겪는다면 버릴 일이 없겠지만, 살다 보면 지우고 싶은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바로바로 내던져 버릴 순 없겠지만 쌓아두면 그것들은 축적되어 내 안의 늪을 형성한다. 그러니 만들어진 ‘인스턴트 늪’을 해소시킬 분출구 또한 필요한 것이다. 쌓여서 활용하지 못한다면 독이 되지만 예상하지 못했을 때 신선한 전환점이 되어주기도 하니까, 각자가 늪을 대하기 나름이다. 물론 이 해석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저마다의 늪처럼 저마다의 해석이 존재할테니.
믿을 수 없던 일을 직접 경험하며 하나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 믿게 되었다. 인생은 그렇게 자로 잰 듯이 나눌 수 없고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무엇이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코믹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가벼운 위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품은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늪은 방심하면 빠지기 쉽지만 빠져도 어쩔 수 없고 최대한 빨리 헤엄쳐 나오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인생의 동반자처럼 같이 가야 하는 그 늪을 대하는 방법을 인생 선배 하나메의 말로 전하며 마침표를 찍는다.
“세상 일들은 거의 다 별거 아니고 인간은 우는 시간보다 웃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고 믿을 수 없는 것도 보이고 하룻밤 자면 대부분 잊을 수 있어. 아무튼 수도꼭지를 틀어! 거짓과 고집과 허세로 얼룩진 시시한 일상을 씻어버리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