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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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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이하 ‘오세이사’)가 지난 13일 개막했다. 작품은 사고로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게 되어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는 ‘히노 마오리’와, 그런 마오리에게 매일 새로운 추억을 선물해주고 싶은 ‘가미야 도루’의 이야기를 담았다. 본격적인 여름의 초입에서 청춘의 풋풋한 사랑의 이야기를 전하는 <오세이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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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상실의 이야기


 

 


<오세이사>는 자신이 놀랄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가미야 도루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아빠와 둘이 살며 집안일을 척척 해내는 도루는 고등학생답지 않게 빨리 철이 든 모습이다. 그런 도루에게 뜻밖의 사건이 생긴다.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을 도우려다 누군지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 반 여학생 히노 마오리에게 거짓 고백을 해버린 것. 해프닝으로 지나갈 줄 알았지만, 마오리가 고백을 받아들이며 계약연애를 하게 되고, 처음 생각과 다르게 도루는 진심으로 마오리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도루가 진짜 마음을 고백하던 날, 마오리는 자신이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오직 오늘뿐인 로맨스’가 시작된다.


<오세이사>는 학교를 배경으로 지극히 평범한 소년과 무언가 비밀을 간직한 소녀가 우연히 마주쳐 사랑에 빠진다는, 순정 로맨스물의 정석을 따른다. 그러나 이런 장르에서 필연적인 오해나 질투 대신 더 넓은 범위의 사랑과 상실의 이야기로 채워나간다. 도루의 가족사가 그중 하나다. 1막에서는 함께 살던 누나가 집을 나간 구체적인 이유나 어딘가 정체된 듯한 아빠와의 관계가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두 주인공의 로맨스만큼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이 가족의 이야기는 얽히고설킨 감정의 밑바탕에 사실은 사랑이 있으며, 상실과 갈등을 겪는 가운데서도 어떤 사랑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침이 되면 전날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는 마오리의 경우에는 매일 매일이 상실의 과정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도루와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은 마오리가 열심히 기록을 쌓아가기 때문이다. 도루와 만날 때마다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하는 모습은 곧 마오리가 가진 삶에 대한 애착을 보여준다. 내일이 되면 기억을 다 잃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는 마오리에게서 우리는 오늘을 소중히 여기고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

 

 

 

소설 VS 영화 VS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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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스틸컷

 

 

뮤지컬 <오세이사>는 탄탄한 팬층이 있는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2020년 국내 출판되어 현재까지 50만부 넘게 판매된 소설은 도루와 마오리, 이즈미의 관점이 번갈아가며 서술되어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선을 파악할 수 있다. 처음에 도루가 거짓 고백을 하는 계기였던 시모카아와 그를 괴롭히던 학생의 변화까지 자세히 담아내며 다양한 종류의 성장을 다룬다는 점도 눈에 띈다. 소설을 읽고 공연을 보러 간다면 소설에서의 감정선이 음악과 무대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다양한 감각으로 이야기를 감상하고 싶다면 영화라는 선택지도 있다. 감독을 맡은 미키 타카히로는 전작 <소라닌>,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등의 순정물에서 보여줬던 아름다운 영상미로 도루와 마오리의 애틋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여기에 OST로 사용된 요루시카의 ‘좌우맹’은 소설의 풋풋한 분위기를 잘 살렸다. 영화는 2022년 국내 개봉 당시 12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러브레터> 다음으로 가장 흥행한 일본 실사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소설,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가는 뮤지컬은 도루와 마오리를 가장 가까이서 만나는 방법이다. 다양한 분위기의 넘버들이 인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가운데,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분리되는 계단을 무대장치로 활용했다. 인물들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마주치기도, 엇갈리기도 하는 모습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쌓이고 흩어지는 기억과 감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소설과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사에구사 켄토라는 인물을 중요한 조연으로 내세워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무대에 화려함을 더한다.

 

 

 

기억과 기록이 없어도 간직되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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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와 마오리는 매우 다른 상황에 처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닮은꼴이다. 미래를 꿈꾸는 게 당연한 나이인 고등학생인데 미래를 기대하지 않거나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 비슷하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아빠와 살아가는 도루에게 매일매일은 변화가 없다. 내일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다. 마오리는 기억을 쌓을 수가 없기에 오늘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자전거를 타고, 피크닉을 가고, 차를 마시는 등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비로소 미래를 기대하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오세이사>다.


내일 기억이 사라져도 괜찮다. 이들에게는 매번 새롭게 채워나갈 수 있는 오늘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기억이나 기록 없이도 두 사람이 온전히 함께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다. 실제로 극중에는 “오늘은 오직 오늘뿐”이라는 대사가 반복되는데, 이 대사는 2막에서 벌어지는 도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이들이 함께했던 수많은 '오늘'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매번 기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연을 보고 나면 묻게 된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라는 제목 뒤에는 어떤 말이 이어질 수 있을까. 아니,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기억이나 기록이 없어도 마음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이 두 사람을 보며 믿게 되기 때문이다. 도루가 죽은 후 이즈미와 켄타가 기록을 바꿈으로써 마오리의 기억도 바꿔 놓지만, 아주 작은 단서로도 마오리는 도루를 기억해낸다. 매일 마오리의 하루를 새롭게 채워가던 도루처럼, 남겨진 마오리는 매일 도루를 새롭게 기억해내기로 한다. 도루는 그 속에서 오래도록 살아 숨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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