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Luxury).
풍요를 뜻하는 라틴어 럭셔스(Luxus)에서 파생되어, ’사치‘를 뜻한다.
흥미롭다. 럭셔리와 사치는 이미지가 꽤나 다르다. 사치스러운 사람과 럭셔리한 사람. 후자가 긍정적으로 비치는 게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언어의 질감에서 비롯된 차이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인 럭셔리가,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 행태인 사치로 번역되는 이유는 뭘까.
우리나라는 세계 럭셔리 시장의 중심이다. 모건스탠리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1인당 명품 소비액은 2022년 기준 약 325 달러로 세계 1위다. 부를 드러내는 것에 관용적이라는 사회 분위기가 유교 사상이 중심이었던 국가에서 형성됐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선조들은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았으며, 화려함은 곧 요사스러움이었다. 전통적 사고와 맞물렸을 때, 럭셔리는 사치가 맞다.
하지만 흘러온 시간만큼이나 사람들의 가치관도 변했다. 이제 럭셔리는 경험과 향유의 대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럭셔리를 거치며, 자신만의 취향을 가꿔나가는 요즘이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법. 우리는 단순히 구매하는 것을 넘어, 소비의 이유를 찾고 그 본질을 묻고 있다.
그래서, 럭셔리란 무엇일까.
서울미술관과 R.LUX(이하 알럭스)의 공동 기획전 [Art of Luxury]를 둘러보며, 우리 시대의 럭셔리를 정의해봤다.
1. 럭셔리는 변한다.
전시의 첫 관문 ‘Material Luxury‘는 럭셔리의 화려함을 연상시키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대표작으로 구성되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정교하고 창조적인 럭셔리는, 독창적인 세계를 일구어 온 예술가들 스스로와 닮아 있다.
빨간 입술의 형상을 소파로 제작한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Mae West Lips Sofa. 윤기가 흐르는 강렬한 색의 작품은 1930년대 최고의 여배우 메이 웨스트의 입술에서 영감을 받았다. 초현실주의의 대표 작가 달리가 표현한 그녀의 입술은 시간이 흘러 마릴린 먼로 등 후대 섹스 심벌들의 입술로 오마주 되기도 한다.
팝 아트 거장 앤디 워홀(Andy Warhol)의 Flowers. 켐벨 수프로 대표되는 소비사회의 산물을 담아낸 그의 작품 치고는 꽤나 단순한 풍경의 작품이다. 물론, 역시 자연의 꽃을 포착하는 대신 잡지에 실린 히비스커스 꽃 사진을 작품에 녹여냈다.
살바도르 달리, 앤디 워홀의 미학은 전통적인 사치와는 거리가 있다. 기괴하고 충격적이며, 에로틱한 예술의 달리. 그리고 복제의 미학을 선보이는 워홀의 작품 세계는 오히려 전통 미학을 해체하고 풍자하는 방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들의 작품은 경매 시장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팔린다. 참고로 앤디 워홀의 대표작 Shot Sage Blue Marilyn의 가격은 약 1억 9천 500만불(한화 약 2500억원)이다.
오늘날 럭셔리 마켓에서는 고급 재료와 장인 정신,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요소들만이 물질성을 대변하지 않는다. 현대사회에 접어들며 시간이나 경험, 희소성처럼 추상적 가치마저 그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더 이상 고급 시계, 자동차, 명품들만이 럭셔리가 아니다. 예술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궁극의 소비가 될 수 있다. 새로운 시대의 예술을 열어젖힌 달리와 워홀의 작품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이유다.
럭셔리는 변한다.
2. 감각의 초월
두 번째 섹션 ‘Spiritual Luxury‘ 부터는 국내 실험·추상미술 거장들의 작품들이 함께했다.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Bodyscape>. 작가의 몸을 도구 삼아 그리는 신체 드로잉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화면을 마주보고 그리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달리, 캔버스의 뒤에서 손을 뻗어 선을 그리거나, 더 이상 손이 닿지 않으면 캔버스를 접은 뒤 다시 뒤에서 그리는 방식 등을 반복한 결과물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의 <아침의 메아리 04_VIII-65>. 작품 속 네모난 테두리로 그려진 색점들은 별을 모티프로 그려진 것으로,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상을 구체적인 형상이 아닌, 점, 선 면 등 조형 요소로 표현한 추상 미술 화풍을 따르고 있다.
과거에는 눈에 보이는 사실적 묘사나 종교·신화적 이야기가 고급 예술의 기준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등 고전 명화를 떠올려보면, 무엇을 그렸는지가 명확히 드러난다. 덕분에 작가의 미감과 기술이 가치 평가에 반영되기 쉬운 측면이 있다.
한편 전시에 소개된 김환기, 이건용의 작품은 관람객이 쉽게 해석하기 어렵다. 무엇을 그렸는지 불분명하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해설 참고가 필수적이다. 20세기 들어 미술계는 점점 시간, 자유, 결핍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관람객 스스로 이런 ‘불친절함‘을 즐기기 위해, 무엇인지 모르겠는 그림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 자체가 교양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절제된 색채와 섬세한 질감이 돋보이는 작품들은 물질의 영역에서 정신적인 영역으로 관객을 인도하며 묵상의 시간을 제공한다. 작품과 관람객이 강한 정서적 연결을 느끼는 순간, 일상 속 놓치기 쉬운 비가시적인 것들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고급스러운 가치로 자리매김한다. 정신을 표출하고, 다양한 내적 탐구를 시도한 작품들이 럭셔리로 인식되는 이유다.
럭셔리는 멀리 있지 않다.
3. 영원, 그 너머에
[Art of Luxury]은 한국의 미가 깃든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를 선보이며 마무리된다. 암실 한가운데 자리한 달항아리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화려한 장식이나 서사 없이도 깊은 감동을 주는 예술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앞으로 이 달항아리가 백년, 천년이 지나도 ’럭셔리‘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감상하는 순간 시공간 너머의 세계와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삶의 밀도와 격을 높여주는 경험을 향유하는 것이 사치가 아니라면 뭘까. 존재 자체로 럭셔리를 체감할 수 있는, 강렬한 마무리였다.
‘Timeless’. 럭셔리에 끝은 없다.
[Art of Luxury]와 함께, “변화무쌍하며, 멀리 있지 않은. 그리고 끝이 없는.” 다소 두루뭉술해진 오늘날의 럭셔리를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럭셔리는 여유로운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가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누구나 소유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럭셔리가 아니다. 두둑했던 적이 없는 지갑은 미래의 내게 맡기며. 오늘 하루 값비싼 것들보다 더 값진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삶을 살아보는 건 어떨까.
[Art of Luxury]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지닌 예술 작품을 소개하며, 앤디 워홀, 쿠사마 야요이 등 국제적인 예술가 18인의 작품 28점을 만나볼 수 있다. 기존 6월 1일 종료 예정이었던 이번 전시는 누적 관람객 10만명을 돌파하며 기존 7월 13일까지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