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인문학적, 예술적 상상력이 만나는 자리로 두산인문극장 2025년 주제는 ‘지역’이다. 그리고 5월 20일부터 6월 7일까지 셀린 송의 작품 <엔들링스>가 이래은 연출을 통해 한국 초연으로 공연된다.
남도의 작은 섬 만재도에는 세상의 마지막 해녀인 할머니 세 사람이 산다. 한편, 지구 반대편 맨해튼에도 한국계 캐나다인 극작가 하영이 살고 있다. 연극은 최후의 해녀들의 일상으로 시작한다. 연극은 크게 5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막은 만재도에 사는 해녀들의 일상과 이에 대한 하영의 해설, 2막은 잠든 해녀들의 TV 화면에 등장한 미국에 사는 극작가 하영, 3막은 하영의 해설이 사라진 해녀의 일상과 죽음, 4막은 백인 남편(겸 극작가)과 함께 사는 하영의 해녀 연극 집필 동기, 5막은 하영의 환영들과 해녀들과의 환상적 방식의 조우. (*설명을 위해 편의상 구분함. 실제 원작의 막 구성은 다를 수 있음)
하영은 최후의 해녀를 팔아 생계를 해결한다
이 연극은 하영에 대한 이야기다. 몰입도 높은 최후의 해녀 이야기에 관객은 백인 후원가와 극작가처럼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나는 하영이 백인 희곡을 써왔다는 말을 이해한다. 연극을 보며, 나는 하영이 잘 쓰고 싶은 것이 백인 희곡이라는 것을 바로 이해해 버렸다. 나는 하영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나는 보편성에 환장한다. 세상의 중심이고자 한다. 되는대로 인류사의 줄기 위에서 살고자 한다. ‘cf’(confer. 참조)가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있는 힘껏 ‘cf’의 땅을 도망친다. 우다다다.
하영은 조금이라도 덜 백인스러운 희곡이 나올까 의식적으로 본인을 경계한다. 조금의 비백인성이라도 글에서 묻어난다면, 사람들은 바로 달려들어 하영의 민족적 기원과 섹슈얼리티-그러니까 이종적이고 흥미로운 것-에 환호하고 싶어질 테니까. ‘너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같이 모멸스러운 말은 없다고. 멸종위기종 동물은, 그리고 나와 너는 텔레비전 화면 밖 팝콘을 입에 욱여넣는 인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한다.
하영은 한국의 해녀보다는 차라리 테너시 윌리엄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영은 해녀에 대해 미국인 남편(겸 극작가)과 아는 바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해녀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이고, 해녀의 작업 방식과 그들의 삶에 감명받았다. 그러나 은은한 하영의 감명에 대한 호들갑은 백인들의 몫. 하영은 이미 받은 후원금을 글로 뱉어야 하는 순간에 처한다. 해당 주제가 진행되는 4막에 이르러 나는 극작가 셀린 송의 용맹함에 감탄하게 되었다. 남편은 질문한다. ‘그래서 너는 후원금에 굴복한 거야?’하영은 답한다. ‘응 굴복했어. 땅이 갖고 싶어서. 굴복해서 나는 이 백인들의 미국을 지배할 거야.’
엔들링스, 최후의 개체들
팔 수 있는 건 팔아야지. 사줄 때 팔아야지. 내가 가진 거를 너희들이 원하는 거로, 탈탈 털어 벌 수 있을 때 벌어놔야지. 그러지 않고 고고하게 버티는 거 언제까지 할 수는 없잖아. 그리고 언제 재미없다고 더 이상 이것들을 안 사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어떤 백인 극작가들은 아시아계 여자 작가들을 시기한다. 그들이 충분한 능력 없이 타고난 몇 가지 속성으로 편하게 관심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정신 차리길. 이건 백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4막-맨해튼-에 이르러서야 나는 1막과 3막-해녀들의 이야기-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막에서 하영은 백인이 자신을 보듯 해녀를 본다. 그들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해설을 덧붙이고 역사를 찾아 주석을 붙인다. 그 해설은 <6시 내 고향>의 리포터 같기도, <인간극장>의 성우 같기도, 오후 4시 동물 다큐멘터리의 코멘트 같기도 하다. 최후라는 말은 낭만적이다. 관객은 텔레비전 화면을 보듯 무대 위의 배우들을 바라본다. 사람의 살이를 노골화하면 진짜 사람은 사라진다.
2막에 백인 희곡을 쓰고 싶은 하영은 미쳐가고 자신이 해설하던 텔레비전 화면을 통과해 만재도에 난입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3막, 유머를 담당하던 하영의 해설은 쏙 빠진다. 초현실적인 상황이 그 해설을 대체한다. 하영은 1막까지 쓴 뒤 후원자들에게 내용을 보여주고, 이들은 감탄하며 연극의 완성을 촉구한다. 하영은 2막의 난입을 통해 받아들인다. 아무리 굴복하려 해도 백인 극작가들이 자신을 보듯 해녀들을 볼 수는 없다는 자신의 처지를. 그래서 하영은 백인이 쓴 백인 극본을 마음껏 조롱하고 희화화한다. 그들이 보고 싶은 자기 모습을 보여준다. 그걸 본 백인이 쿨한 표정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필사적으로 미친 여자 역할을 자처한다.
해녀와 하영이 조우하는 것은 5막에 이르러서이다. 하영과 해녀는 모두 어색한 한복을 입고 등장한다. 각자의 섬-맨해튼과 만재도-에서, 연극하고 물질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바다는 많은 사람 잡아먹지만, 나를 살게 했어. 연극은 쥐뿔 나에게 해주는 것이 없고 나를 배고프게만 해. 하영은 백인 남편(겸 극작가)보다 먼 타국 해녀들의 이야기를 판다. ‘cf’의 땅을 뉴욕 한복판에서 판다. 최후의 개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그마한 부스러기도 갈고 갈아 마침내 누울 땅을 만든다. 다시, 그것이 나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