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살면서도 겨울을 품고 있는 세 청춘이 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를 꿈꿨지만 부상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여행 가이드로 일하고 있는 나나, 상하이 금융계에서 번듯하게 일하고 있지만 삶을 직접 선택해 본 적 없는 하오펑, 나고 자란 고향에서 매일 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꿈 없이 살고 있는 샤오. 상하이로 돌아갈 비행 편을 놓쳤다는, 조금은 흔해빠진 계기로 그들은 연길에서의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결국 또다시 청춘의 이야기. 안소니 첸의 <브레이킹 아이스>에 등장하는 세 청춘은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의 시기를 살고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시린 입김과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의 연길에서 진행된다. 두 언어가 함께 공존하는 경계의 공간에서, 봄을 살면서도 마음속엔 겨울을 지닌 세 사람은 언제나 이방인이다. 그들은 각자 저마다의 모양을 한 얼음이 되어 이리저리 미끄러지고, 녹고, 얼어붙는다. 마모되기보단 녹아버리고, 절절 끓기보단 얼어붙어 버린다.
조금은 억지스러운 핑계로 인한 7일간의 동행. 그들은 함께 마음껏 방황하고, 취하고, 저지르지만 아이처럼 웃고 즐기는 순간들 사이에도 숨길 수 없는 각자의 상처 때문에 자주 무너지곤 한다. 그 무너짐은 얼음이 녹아내리는 양상과도 비슷해서, 때로는 뜨거운 눈물을 동반하기도 하고 더운 숨과 체온을 공유하기도 한다. 단단한 얼음처럼 얼어있던 그들의 부분들은 타인의 체온에 의해서, 나를 위해 흘리는 뜨거운 눈물에 의해서, 또는 달라지고자 하는 결연한 마음에 의해서 녹아내린다.
물이 된다.
동행의 시간은 비로소 유영하는 봄을 살기 위한 생의 전환점이 된다.
사실 이제 지지부진한 젊은 시절의 방황기는 조금 질리던 참이었다.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고, 가진 것은 없으며, 무언가가 휘두른 폭력에 생긴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시기. 다만 이리저리 부딪혀 내 모서리를 마모시켜야만 하는 것만이 허락된 시기. 그런 이야기들이 지겹게 느껴졌던 이유는, 그들이 그 시기를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그로부터 한걸음 멀어진 위치에서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곳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괴로움의 시기를 미화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브레이킹 아이스>는 세 인물의 일탈 같은 동행을 비추며 그들의 관계와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멀리 떨어져 관조하기보단 내밀하게, 그들의 관계를 살피려 노력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를 박탈당한, 어딘가에 속할 수 없는, 그렇기에 얼음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세 인물의 공허함이 아주 근거리에서 관찰한 듯 느껴졌다. 청춘이라는 이미지가 아니라, 그 안을 직접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공허한 얼굴을 아주 공들여 보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조금 섣부르게 표현하자면, 영화는 결국 얼음과 같이 얼어있던 세 인물들이 서로의 체온과 온도에 의해 녹아내리며 진정한 삶을 살 용기와 힘을 얻는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듯했다. 다만 그 얼음이 녹아내릴 만큼의 세 사람의 교감이, 잘 와 닿지 않았다. 꿈을 포기한 자, 꿈을 박탈당한 자, 꿈을 꾸어본 적이 없는 자. 각자의 상처가 꽤나 깊어 보임에도 영화는 그것을 끌어안지 못한 채 그저 얼버무리고만 있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모호하고 미지근한 관계의 온도가 과연 서로의 얼음을 녹이고 물로 만들어 삶을 유영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는지, 과연 이 7일간의 동행이 그 정도의 온기를 가지고 있는지. 아직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의미심장한 은유, 미지근한 관계의 온도, 종국엔 그들이 이 애매한 동행의 끝에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것까지도, 여전히 미스터리다.
이 애매함 속에서 여전히 혼란함을 느끼고 있음에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연길에서 나고 자란 샤오가 그의 조카에게 새로운 선택을 선언했을 때. 떠나는 것을 결심한 자의 결연하고도 매몰찬 태도와 뒷모습을 보며 그저 눈물만을 흘렸던 조카의 얼굴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그 순간만큼은 이야기 안의 관계가 아닌, 마치 ‘진짜’ 삶의 긴밀한 관계를 본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어떤 부분은 여전히 의문이지만, 어떤 부분은 이상하리만치 깊게 와 닿았던, <브레이킹 아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