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 중 하나는 내가 쓰는 글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설, 시, 시나리오, 평론... 그리고 이 글도 마찬가지다. 이 글을 읽을 어느 누군가는 도저히 에디터의 생각에 공감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면 이 글이 꽤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 어느 쪽으로 흘러갈지는 작가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신념과, 생각에는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고, 그 차이를 좁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글을 읽어도 누군가는 사랑이라고 해석하고, 누군가는 이별이라고 해석하는 해프닝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일은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그린 작품에서는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게 일이고, 감동을 주는 가족 이야기라면 감동을 주도록 해야 한다. 이런 에세이 종류의 글에서는 일상적 공감(아,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이 중요한 것도 마찬가지의 원리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작가가 작품 안에서 의도한 바를 전하기 위해서는 ‘공감’ 시키는 게 필수다.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면 감정이 사라지고, 감정이 사라지면 흡입력이 사라진다. 흡입력이 사라지면 글을 읽을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에 독자를 붙잡아 둘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은 어떻게 하면 독자의 ‘공감’을 이끌 수 있는지 고민하는 글이냐고?
아니다. 이 글은 내 ‘목마른’ 욕심을 털어놓는 글이다.
앞에서 구구절절 설명했던 대로, 모든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해리 포터>를 읽고도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을 보고도 이 정도면 잔인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이건 모두 실제로 들었던 말이다) 그래, 나는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쓰는 글의 독자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목이 마르다.
내 이야기를 조금만 덧붙여 보자면, 내 꿈은 작가다. 그건 여섯 살 생일 때 어린이집 마이크를 잡고 “나는 나는~ 작가가 될 거야”라고 노래를 불렀던 그때부터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몇 살 더 자란 다음에는 재미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더 자란 다음에는 아주 장대한 판타지 소설을 쓰고 싶어졌고, 많이 자란 다음에는 드라마와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졌다는 것만이 하나씩 추가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글을 쓰고 싶어졌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내가 만든 인물을 따라가며 함께 울고 웃고 즐기고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나를 목마르게 한다. 앞에 물 한 잔이 놓여 있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더 커다란 물병을 찾는다. 이러다가 아예 집 안을 물병들로 꽉 채워버릴 기세다. 하지만 이런 갈증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마실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고, 그건 내가 굴러가도록 도와주는 동기가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제목인 “우리는 목이 마르고 자주 등이 젖지”는, 고선경 시인의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의 첫 페이지에 담긴 시의 제목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문장이 거꾸로 뒤집어지는 상상을 했다. 사람들은 등을 젖게 할 수 있는 정도의 충분한 물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항상 목이 마르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을 굴러가게 하는, 영원히 해갈되지 않을 목마름이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