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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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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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와 야심 차게 계획한 해외여행이 채 이 주도 남지 않은 시점에, 황당하게도 나에게 여권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야 말았다. 국제선 공항에 들어섰던 마지막 기억이 고등학교 1학년에 머물러 있으니, 그로부터 무려 5년이 흐른 지금은 여권 기한이 만료되고도 남았으리라. 타지 땅은 밟지도 못한 채 항공사와 호텔에 반대급부 없이 기부할 게 아니라면, 오늘이야말로 서둘러 구청에 방문할 때였다.

 

*

 

20분 지나고 오세요.


구청 근처 홈플러스에 위치한 사진관에서, 사장님의 능숙한 솜씨 덕에 속전속결 여권 사진 촬영을 끝마쳤다. 보정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3층에 있는 서점이나 갈까 하고 걷기 시작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도착한 3층에서, 내 눈길을 잡아끄는 곳은 바로 '작은 동물원'이라는 영세한 수족관 부스였다.


어항 속에서 유영하는 알록달록한 물고기들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코입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작았다. 기억에 남는 종이 몇 가지 있었다.


멀리서 보면 멸치와 헷갈리겠다 싶던 은색 무리의 물고기는 '샤페'라는 생소한 이름을 가졌다. 그 옆에는 '난주'라는 금붕어가 있었는데, 닌텐도 게임 '동물의 숲'에서 '레어(rare)' 한 종으로 분류되어 낚시 번들 채울 때 고생깨나 시켰던 그때 그 녀석이었다. 대부분이 소형 종이었지만, 맨 오른쪽 어항에서 헤엄치던 가장 큰 물고기는 바로 '철갑상어'였다. 당최 왜 '상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없는 미니멀한 비주얼이었지만, 따로 자리를 배정받을 만큼 특별 취급 받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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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어항 유리에는 붉은색의 보드마카로 물고기들의 가격이 적혀 있었다. 어디 보자, 샤페는 1000원, 난주는 6000원, 철갑상어는 16000원. 한 마리 가격인지 묶음 가격인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물고기 가격표를 바라보면서, 인터넷에서 한때 유행하던 국밥 밈(meme)을 떠올렸다. "야! 그걸 왜 사 먹냐? 그 돈이면 차라리 뜨끈~하고 든든~한 국밥 한 그릇 사 먹고 말지," 라는. 비싼 값에 파스타 등을 사 먹을 바에야 평균 7~8천 원짜리 국밥이 더 배부르겠다며 야유하는 글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남이 뭘 사 먹던 국밥과 비교하며 훈수를 두는 이들을 되레 비꼬는 밈이 됐다. '국밥충'이라 조롱받는 이들의 심정은, 그러나, 종종 이해 가능한 범주에 놓인다. 포크질 한 번에 끝날 조그만 디저트가 한나절 내내 포만감을 주는 국밥보다 값비싸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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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의 탄생에는 내러티브가 수반된다. 조그만 디저트가 오븐 밖으로 나오기까지는, 푸르른 1A 등급 초원에서 건강한 젖소를 키운 목장주의 노력, 궂은 날씨에도 흠집 하나 없이 동그란 과육을 수확한 농부의 노력, 과거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베이킹에 도전해 해외 유학까지 다녀온 파티시에의 노력,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피땀 눈물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계산대 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숫자뿐이며, 내러티브는 은폐되어 있다. 숫자들은 한껏 가치중립적인 체 점잔을 떨면서 내러티브의 공백을 '0'으로 채워 넣는다. 숫자는 말이 없다. 우리가 가격표를 보고 종종 느끼는 괴리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게다가, 가격 책정은 탄생의 내러티브를 단순히 은폐할 뿐 아니라 애초부터 특정 기준에 의해 선택적으로 추려낸다. 예컨대, 샤페는 1000원, 난주는 6000원, 철갑상어는 16000원, 그리고 신세계몰 애견숍에는 한 달 월세의 몇 배 만큼이나 비싼 강아지들이 있다. 만일 이 가격들이 책정될 때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는 내러티브를 고려했다면, 어떤 생명이 다른 생명보다 더 비쌀 이유는 하나도 없다.


더욱이 어떤 생명은 생명이 아닌 것보다도 더 값싸다. 샤페는, 숫자가 뭔지도 모를 천진난만한 이 샤페들은, 국밥보다도 값싸다. 오로라처럼 유영하는 은색 샤페 무리와 1000원이라는 대충 쓰인 가격표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생명의 탄생과 국밥의 탄생 사이 7000원의 간극을 곱씹으면서, 생명의 탄생보다 디저트의 탄생에 더 큰 가치를 매기는 자본주의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알 수 없는 찝찝함을 잠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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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도착하기까지 꽤 헤매야 했다. 이곳 홈플러스에 방문할 때마다 들렀던 '토마토 북스'의 자리는, 벌써 크리스마스 장식을 시작한 널찍한 가구 매장으로 대체되고 없었다. 포인트를 많이 적립해 뒀었는데, 채 써 보기도 전에 '토마토 북스'는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다행인 것은, 서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전의 '토마토 북스'보다는 훨씬 좁지만, 작은 서점이 나름의 구색을 갖추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입구 맨 앞에 위치한 소설 칸에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점장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었는지, 그의 장편집들이 책장 한 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개중에, 제목이 특이하고, 또 하루키 책이 대부분 1, 2, 3권으로 나뉘어져 있는 데 반해 한 권짜리로 읽을 때 부담이 덜한 책을 하나 골랐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꾸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나는 쓰꾸르 씨와 손을 잡고 계산대로 향했다.


14800원입니다.


왠지 모를 불편함, 평소 그리 깔끔 떠는 성격도 아닌데 ,000으로 끝나지 않는 가격표를 보면 왠지 쓰다만 듯한 찝찝함이 느껴진다. 지갑 속 카드를 꺼내면서, 나는 속으로 구시렁 섞인 질문을 곱씹었다. '왜 하필 만 사천팔백 원이야? 깔끔하게 만 오천원이면 얼마나 좋아?'하고. 200원의 결핍 또는 800원의 과잉을 만들어낸 것은 이 책의 어떤 부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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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책의 가격이 어떻게 책정되는지에 관해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인쇄비나 제작비가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 같은 저자의 같은 소설도 양장본이 더 비싸다는 사실로부터,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추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시장에서, 적어도 가격을 매기는 그 순간, 책은 물질에 불과하다. 종이와 잉크와 풀과 실을 적절히 엮은 어떤 물질.


물론, 책의 표지나 내지 디자인은 구매를 결정할 때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그러나, 내가 책을 구매하는 가장 큰 동기는, 하루키가 견고하게 쌓아 올린 철학이 그대로 녹아든 소설, 그러니까 비물질의 정수를 맛보고 싶어서였다. 다만 철학이니 문학이니 하는 비물질을 정량적으로 평가하여 구체적인 가격을 상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자본주의는 비물질을 물질의 합으로 치환해 가격을 책정한다.


예를 들어, 콘서트 티켓 가격을 정하는 방식은, 총제작비를 객석수로 나누는 수식이다. 이때, 제작비에는 출연료, 배우 스텝의 항공료 및 숙박비, 무대 세트 제작비 및 운반비, 홍보마케팅 비용이 포함된다. 그러니까 어떤 콘서트의 가격이 높다면, 그 이유는 작품이라는 비물질 그 자체의 가격이 아닌, 비물질을 구현하는 데 들인 물질의 '제작' 비용의 합이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생략하거나 치환하거나. 삶은 연속적이지만 숫자는 불연속적이며, 숫자 없이 세상과 접하는 방법을 우리는 이제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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찝찝함과 책 한 권을 양손에 들고, 20분 하고도 2분이 지나 다시 사진관으로 돌아왔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던 건지, 아직 내 사진은 한참 보정 중에 있었다. 사진관 사장님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내 모습은, 분명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면서도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주름과 잡티가 은폐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면서 왠지 모르게 민망했지만, 사장님의 센스와 컴퓨터 기술 발전의 유려한 합작 덕에 앞으로 10년 동안은 덜 피곤해 보이는 얼굴 사진으로 해외를 여행할 수 있게 됐다.


사람이 아닌 사람의 상을 구매한다. 사람에 가격표를 붙일 순 없겠지만, 적어도 사람보다는 사람의 미메시스가 훨씬 저렴할 것이다.


만약 샤페가 증명사진을 찍으러 오면 그때는 얼마일까? 똑같이 17000원이려나? 샤페 그 자신보다도 샤페의 미메시스가 17배나 더 비싼 아이러니한 상황을 상상해 본다.


날씨도 좋고 한가하니 실없는 생각이나 하는구나, 나는 받아 든 사진을 청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구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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