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학에는 텍스트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기호학적 이론에 기반한 개념으로 의사소통 과정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풀어내자면 당신이 누군가에게 '아빠'라는 단어를 말했을 때, 그게 특정 인물의 아버지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단어 자체를 의미하는가의 결정권은 말하는 당신이 아닌 그 대화 과정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의미를 맞춰가는 과정이 서로 어긋나면 의미의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기에 텍스트는 형성되지 않는다.
기호는 어떤 대상을 나타낼 수 있는 모든 물리적 실체다. 그게 글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물론 그림일 수도 있다. 우리가 텍스트라는 말을 '문자'와 동의어처럼 쓰다 보니 이렇게 좁은 의미에 갇히고는 한다. 시야가 좁아져 책은 당연히 글로 가득 채운 종이의 묶음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그림으로도 책이 될 수 있다고. 그림책은 그림으로 말하는 책이라고.
꽤 머리를 띵 하게 울리는 말이었다. 왜 ‘책=글’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못 해봤을까 싶었다.
그 충격 덕분에 두 작가가 제안하는 '그림책 만들기 7단계'에 빠져들었다. 자연의 섭리를 빌려 씨앗이 열매를 맺기까지의 성장 과정에 빗대어 설명하는 ‘그림책 산책’이라는 첫걸음부터 하나의 책 완성에 이르는 여정은 꽤 느린 걸음임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은 아이디어 싸움이다. 무엇을 어떻게 떠올리는가의 문제로 싸우는 게 창작의 영역이다. 그림만으로도 책이 될 수 있다는 남들과 다른 참신한 생각이 필요했다. '무엇을'의 문제는 끝이 났으니 '어떻게'의 문제가 남았다. 이 한 권의 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하는 게 '어떻게'의 문제다. 어떻게 글이 아닌 그림의 문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지, 그 이야기를 그림책이라는 형태로 어떻게 담아낼지를 말하고 있다.
특히나 이 '어떻게'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두 작가는 그림책의 물성을 특별히 들여다보라고 권한다. 양쪽 페이지를 함께 펼쳐 읽는 독특한 리듬, 판형과 비율이 이야기에 은밀하게 미치는 영향력, 배경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작용하는 방식. 이런 요소들이 '글과 그림이 함께 있는 책'을 넘어 진정한 '그림책'을 만드는 비밀이라고. 시각 예술에서 내용과 형식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진리가 그림책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것이다.
생각만 하는 것과 한 번이라도 해보는 것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틈이 존재한다. 백문불여일견, 백견불여일행. 일단 해보면 많은 것을 배운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말을 듣고, 상세히도 읊어주는 설명을 따라 해보면 그림의 문법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갈피가 잡힌다.
이 책은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손을 움직이게 만든다. '생각해 보기'와 '실전 과제'라는 이름으로 독자를 창작의 세계로 부드럽게 밀어 넣는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연필을 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QR코드를 통해 열리는 전자책의 세계는 더 깊은 탐색을 위한 또 다른 문이 되어준다. 게다가 책 속에 담긴 작가들의 솔직한 인터뷰는 그림책 창작이 절대로 쉽지만은 않은 여정임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 진솔함이 오히려 위로된다.
결국 그림책 만들기는 자기 안의 이야기를 꺼내 보는 용기의 여정이다. 그림책 작가의 꿈을 안고 있는 이들에게, 또 그림책 수업을 이끄는 선생님들에게, 이 책은 단순한 안내서가 아닌 등불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이야기가 있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할 무한한 가능성이 잠들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