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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 1860~1939)


 

알폰스 무하는 아르누보(Art Nouveau)를 대표하는 체코 출신 화가이자 디자이너다. 곡선 중심의 장식적 구도와 풍부한 색채, 이상화된 여성상을 특징으로 하는 ‘무하 스타일(Le Style Mucha)’은 순수미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유럽 대중문화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1885년, 쿠엔 벨라시 백작의 후원으로 뮌헨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 무하는 역사화와 종교화를 중심으로 미술 교육을 받았고, 1887년 파리로 옮겨 아카데미 줄리앙과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보다 자유로운 예술 탐구를 이어갔다. 그러나 1889년 후원이 끊기며 생계를 위해 삽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무하의 예술가 생애의 중요한 전환점은 1894년 말, 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의 연극 <지스몽다(GISMONDA)> 포스터 작업을 맡으며 찾아왔다. 짧은 시간 안에 완성한 이 작품은 대중과 예술계를 사로잡았고, 무하는 사라의 전속 포스터 작가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무하 스타일’을 정립했다. 인쇄매체의 확산과 맞물려 그의 작품은 도시 전역에 퍼졌고, 무하는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 예술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오해과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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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들어서기 전, 입구에 즐비한 포스터를 먼저 감상했다. 균형 잡힌 곡선과 여인, 부드러운 색감, 세밀한 장식을 볼 때, 가히 '예쁘다'는 말 말고는 다른 감상을 붙일 수 없었다. 화려한 미감과 대중적인 스타일을 보는 눈이 즐거운 전시가 되리라 예상했다. 그저 그것이 무하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시를 관람하며, 이러한 편견은 조금씩 깨졌다. ‘예쁜 그림’ 너머에는 그보다 깊은 서사가 존재했고, 장식적 미학 뒤에는 신념이 있었다. 무하는 단순히 ‘아름다움에 능한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삶으로 예술을 살아낸 사람이었고, 자본의 논리 안에서도 자기 철학을 지켜낸 예술가였다.

 

 

 

성실 불변의 법칙


 

1894년 파리,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무명 삽화가였던 무하에게 연극 <지스몽다(GISMONDA)>의 포스터 의뢰가 들어왔다. 포스터 제작자들이 모두 휴가 중이던 그때, 인쇄소에 남아 있던 무하가 선택된 것이다. 며칠간 밤을 새우며 완성된 포스터는 파리 전역을 사로잡았다. 전설적인 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위한 이 작업은 무하의 인생을 바꿨다.


우연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결코 운만으로 이루어진 성과는 아니었다. 무하가 남긴 여러 자료집 속에는 치밀한 자료 조사, 인체 비례 연구, 장식 구성에 대한 기록들이 빼곡히 남아 있다. 주어진 시간의 양을 질로 바꾸어 쓰는 무하의 성실함은 결국 그가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서사의 개연성이다.

 

 

 

예술과 자본 사이에서


 

무하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상업예술가’라는 이명(異名)이다. 그는 광고 포스터, 연극 포스터, 제품 홍보 디자인 등 자본의 요청에 응답하며 활동했다. 상업예술가로서의 면모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고객사의 주문에 따라 작품을 찍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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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HAMLET)>의 포스터에서 그는 주인공을 연기한 여성 배우의 여성성을 강조하기보다, 캐릭터의 내면에 잠재된 남성적이고 절제된 분위기를 차용했다. 당시 여성이 남자 배역을 맡더라도 여성성을 그대로 드러내도록 그리는 관습과는 대조적이다.

 

<욥(JOB)> 포스터에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드러내기 위한 시도가 엿보인다. 광고주 요청에 따라 아라베스크 문양을 차용하면서도, 자신만의 선과 구도를 유지했다. 그는 자본의 요구에 굴복하거나 자기 철학을 견지하기보다, 상업 안에서 새로운 방식을 찾는 ‘타협점의 미학’을 보여주었다.

 

 

 

모두를 위한 예술


 

무하의 작업에서 인상적인 점 중 하나는 예술의 대중화에 대한 태도였다. 그는 예술을 지식인이나 특정 계층의 전유물로 여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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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무하의 연작 시리즈다. 사계절, 꽃, 보석 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일상적인 소재와 직관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굳이 복잡한 해석이 없어도, 그림 자체만의 감동이 있다. 인쇄 기술을 활용해 판화로 복제된 작품들은 일반 가정과 공공장소에도 걸렸고, 무하는 이를 통해 예술이 사람들의 삶 가까이에 머무를 수 있음을 증명했다.

 

 

 

민중의 붓, 무하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도안 Preparatory study for stained glass for the New Archbishop’s Chapel in St. Vitus Cathedral in Pragu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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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는 파리에서의 명성을 뒤로하고, 조국 체코로 돌아간다. 그는 남은 생애를 상업 작품 대신 민족의 정체성을 담는 작업에 몰두했다. 프라하 성 안의 성비투스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도안을 맡았고,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후에는 우표와 지폐 디자인을 통해 신생 국가의 정신을 그려냈다.


무하의 궁극적인 프로젝트는 <슬라브 서사시>였다. 20점의 대형 회화로 구성된 연작은 슬라브 민족의 역사와 신화를 기록한, 일종의 ‘민족 화폭 연대기’다. 단순한 미적 성취를 넘어서 예술이 시대와 공동체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무하의 대답이다.


1939년, 나치 독일이 체코를 점령하자 무하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고,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생을 마감했다. 그를 추모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무하의 장례식에는 무려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다. 그는 민족의 화가이자 시대의 증인이었다.

 

 

 

아름다움을 다시 정의하다


 

무하의 그림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피상적이지 않다. 그는 날마다 준비된 예술가였고, 시대의 흐름을 읽는 전략가였으며, 조국을 위해 붓을 든 운동가였다. 이번 전시는 그런 무하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도슨트와 함께 감상하면 무하의 서사를 더 깊이 관람할 수 있다.


전시장을 나서며, 처음과는 다른 감정으로 포스터를 바라봤다. ‘예쁜 그림’일 뿐이었던 작품 속에 비로소 ‘아름다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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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증을 고치기 위해 날을 정해 물건을 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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