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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창작물을 평론할 때 인물이 ‘입체적’으로 묘사되었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인물의 한가지 면, 특히 선과 악 둘 중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면을 보여주었을 때 서사는 훨씬 풍부해지고 관객은 자신을 작품에 투영시킬 여지를 얻는다. 즉, 인물의 입체성은 그 인물을 심도 있게 이해할 가능성을 뜻한다.


그런데 작품 속 인물들은 애초에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 원천을 두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이러한 ‘입체성’이라는 개념으로 실제 삶에서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을 성찰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와 아주 가까운 가족 친구들부터 한 다리 건너 전해 들은 누군가의 이야기, 심지어 수치 하나로 대표되는 불특정한 사람들까지. 한 명 한 명이 본래 저마다의 역사와 특질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면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나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오해하는 서로를 이해했으면 해서, 그러니까 우리는 타인을 오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차원론의 틀을 빌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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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계를 발명한 르네 데카르트

 

 

점은 0차원, 선은 1차원, 면은 2차원, 입체는 3차원이다. 선의 세계에서는 점밖에 볼 수 없다. 면의 세계에서는 선만 겨우 볼 수 있다. 입체의 세계, 곧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인간은 면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면이 아닌 입체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곤 하는데, 이는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각각 다른 시점에서 받아들이는 2차원 정보 간의 차이를 뇌가 깊이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상 입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뇌가 자체적으로 보정하여 만들어낸 가상의 정보이다.

 

여기서 요지는, 일상적으로 행하는 타인에 대한 판단의 토대가 이러한 물리적 차원의 단계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가령, 친구의 남자 친구 얘기를 듣는다고 하자. 우리는 친구의 묘사를 토대로 그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친구를 위하는 마음을 담아 거침없이 말한다. ‘쓰레기네. 헤어져.’ 그러나 분명 우리에게 불만을 가득 토로했던 친구는 애인과 그렇게 쉽게 헤어지지 않는다. 너무 당연한 얘기이긴 하지만, 친구는 우리는 보지 못한 그의 무궁무진한 다른 면을 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우리는 그 사람을 ‘선’ 정도로 보고, 친구는 그를 ‘면’으로 본다.

 

물론 타인의 다양한 면을 아는 것은 때론 독이 되기도 한다. 3차원 세계에서 입체를 본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앞서 언급했다. 타인을 아는 것의 독은 바로 여기서 오는 것이 아닐까. 남들에 비해 다양한 면을 보았기에 상대방을 입체로 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입체인 그 자신을 온전히 관측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 또한 그의 여러 단면을 토대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뿐, 한 번도 그를 제대로 본 적 없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의 이미지와 현실이 자꾸만 어긋날 때, 우리는 실망한다. 그래서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을 고치려는 시도에 이르기도 한다.

 

한편, 21세기의 우리는 매일 셀 수 없는 점들을 마주친다. 사실은 입체임에도, 아주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니 점이 된다. 아주 최소한의 정보만 가진 채, 이름도 모르는 그 누군가를 규정한다. 나는 사회의 혐오와 갈등이 극단화되어 가는 현상에 대하여, 타인을 관측하는 기회가 대거 전산화되었음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를 입체로 이해할 수는 없을지언정, 오감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의 ‘면’ 정도라도 직접 보고 소통한다면. 남을 혐오하기가 이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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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한 봄의 저녁, 건물 창가에 앉아 물끄러미 사람 구경을 해보자. 옷차림과 표정과 발걸음 등을 관찰하면서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마음껏 상상해 보자. 3차원의 다음 차원은 ‘시간 차원’을 더한 4차원이라고들 한다. 사람들이 뚫고 지나온 시간을 유추해 보자. 어라, 눈으로 좇던 사람이 내가 앉은 건물로 들어온다. 내 옆자리에 앉는다. 통화 너머로 하는 대화가 들린다. 어떤 면을 보게 되었을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이 작은 입체들이 각자 살아온 시간이 참 유구한 탓이다. 그러니 점들과 가까워져서 선을 보고 면을 보게 되어도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다만 나는 우리가 억겁의 시간 중 찰나를 공유할 수 있는 입체들이라는 게 문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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