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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클래식 공연장을 찾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사실 프로그램을 자세히 확인하지도 않은 채, 지브리 OST를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들을 수 있다는 소식 하나만으로 공연장을 향했다. ‘이웃집 토토로’의 따뜻한 선율,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아련한 멜로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깊은 여운이 웅장한 클래식 연주로 펼쳐질 생각에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그런데 공연장에 도착해 팸플릿을 펼치자마자 예상치 못한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브리 OST를 드뷔시, 리스트, 쇼팽 등 거장의 스타일로 편곡.' 클래식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신선한 기획이라는 기대감과 동시에, 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뒤섞였다. 클래식은 늘 멀게만 느껴졌고, 아무리 귀에 익은 멜로디라 하더라도, ‘클래식으로 재해석된다’는 말은 어딘가 나를 공연의 바깥으로 밀어낼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걱정은, 첫 곡이 시작되자마자 산산이 흩어졌다.

 

 

[포스터 최종] 0413 더벨과 함께하는 지브리 페스티벌.jpg

 

 

1부의 무대는 클래식과 지브리 음악이 ‘각자의 언어로 대화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단순히 지브리 OST를 고전 음악 스타일로 편곡한 것이 아니라, 고전 명곡과 애니메이션 음악을 마치 매쉬업처럼 엮어내는 구성이었다. 드뷔시의 ‘꿈’과 토토로의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 서로의 감정을 이어주듯 연결될 때, 나는 음악이 감정의 언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두 곡의 감성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졌고, 몽환적이고 섬세한 분위기 속에서 익숙한 지브리의 선율이 완전히 새로운 풍경으로 피어났다.

 

그 순간부터 공연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리스트의 웅장한 피아노 선율 위로 ‘하울’의 테마가 겹쳐지거나, 쇼팽의 낭만적인 흐름이 ‘키키’의 경쾌함과 손을 잡을 때마다, 클래식이라는 장르가 결코 과거의 유산에 머무르지 않음을 실감했다. 연주는 유려했고, 감정은 풍부했으며, 무엇보다 자연스러웠다. ‘클래식도 이렇게 즐길 수 있구나’ 싶은 경험. 평소 매쉬업이나 리믹스 음악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너무나 반가운 시도였다.

 

피아니스트 송영민 님은 연주와 해설을 동시에 맡아 공연의 밀도를 높여주었다. 그는 클래식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을 위한 다리 역할을 자처하며, 곡과 곡 사이에 서서 ‘이 곡은 어떤 거장의 작품과 어떻게 엮였는지’, ‘어디에 귀를 기울이면 좋을지’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이 해설 덕분에 음악은 비로소 감상이 아닌 ‘참여’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나는 단순히 듣는 사람이 아닌, 느끼고 해석하는 ‘공연의 일부’가 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순간은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 3악장과 지브리의 '언제나 몇 번이라도'가 절묘하게 맞물리던 장면이었다. 빠른 현악기의 리듬과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이 마치 디제이의 믹스셋처럼 교차하고, 서로를 이끌며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내는 그 순간은 감동 그 자체였다. 음악이 단지 ‘틀어진다’는 차원을 넘어, 새로운 언어가 되어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2부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지브리의 OST를 원곡 그대로 연주한 순서로, 해설도, 클래식적인 편곡도 없이 온전히 음악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원령공주', '마녀 배달부 키키' 등 익숙한 작품들의 테마곡이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펼쳐졌고, 관객석은 말 그대로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집중의 공간이 되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멜로디지만, 이처럼 정제된 공간에서 울리는 선율은 분명 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시간이 단순히 ‘감상’의 시간이 아니라, 음악을 내 안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체험의 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1부에서 송영민 님의 해설을 통해 ‘클래식을 이해하는 방식’을 익혔다면, 2부에서는 지브리 OST의 원곡 그대로 연주되어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묻어나있는 아련함과 학창시절의 향수는 나를 그 때 그 시절로 데려갔다. 히사이시 조는 역시 천재구나, 다시 한 번 느꼈다.

 

공연이 끝난 뒤, 나는 공연장 밖으로 나서며 한동안 마음속에서 울리는 여운을 지울 수 없었다. 단순히 좋은 공연을 본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던 클래식에 대한 낡은 생각 하나를 조용히 허물고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송영민 해설자의 말처럼, 과거에는 클래식이 특별한 문화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였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향유하던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많은 콘텐츠와 자극 속에 살고 있다. 짧고 빠른 메시지에 익숙해진 이 시대에서, 음악 하나에 집중하고 그것의 흐름을 따라가는 경험은 오히려 더 낯설고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그 어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열쇠’를 우리 손에 쥐어주었다. 클래식은 결코 멀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만 조금의 안내와 따뜻한 접근이 더해진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예술이라는 것. 그리고 그 예술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깊은 감정으로 우리 곁에 머무른다는 것.

 

언젠가 먼 훗날, 지브리의 OST들이 오늘날의 클래식처럼 연주되고, 분석되고, 해석되는 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때 누군가는 이 곡들을 들으며 “그 시절, 이 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구나” 하고 말하겠지. 그리고 나는 그 미래를 조금 더 가까이서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다. 클래식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 단지 ‘음악’이 아니라, 그 음악을 통해 연결된 감정과 기억, 그리고 삶의 여백이었음을 이번 공연이 말없이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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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인 것 중에 편식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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