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리에게 가까운 과거인 팬데믹 시기를 배경으로, 한 시골 마을에 글램핑 사업을 추진하려고 하는 연예 기획사 직원들과 이를 반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사건을 그렸다. 작품의 감독인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작품으로 제8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제17회 아시아 필름 어워즈 작품상과 음악상을 동시에 수상하였다. 그만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년 모두에게 작품성을 인정받는 영화였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끝없이 늘어선 겨울 숲의 나뭇가지들이 보인다.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앙각샷을 통해 마치 인간이 고개를 쳐든 채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시야처럼 느껴진다. 이외에도 작품은 거대한 자연 속에 놓여 있는 인물들을 롱샷으로 잡아 유독 작게 보이게끔 담아내기도 했다.
이처럼 영화에는 인간을 배제하거나 영향력이 부족한 존재처럼 그려낸 장면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먼 곳에서 그들을 관망하는 듯한 카메라 시선 처리는 자연의 경이로움과 인간 존재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러한 카메라 앵글에 변주가 오는 전환점은 인물들이 자연물을 가까이 들여다보기 위해 행동하는 순간이다. 앵글은 자연물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시점샷으로 땅 와사비와 죽은 사슴 뼈를 비춘다. 이때 땅 와사비는 눈밭 속에서도 살아나는 생명력을 상징하며, 그것을 관찰하던 이들은 땅 와사비를 직접 손으로 채취해 뜯어먹기까지 한다. 반면 죽은 사슴 뼈는 말 그대로 생존하지 못한 채 존재다. 이같은 ‘죽음’은 영화에서 굉장히 상징적인 요소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타카하시를 포함한 세 사람이 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갑작스레 사슴 관련 이야기가 등장한다. 글램핑 사업이 추진되는 장소가 기존 사슴 통로였다는 말을 들은 타카하시는 평소 사슴을 실제로 볼 기회가 없는 도시 사람들이 분명 좋아할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후 뒤따라오는 ‘사슴은 어디로 가냐’는 질문에 타카하시는 ‘어디로든 가지 않을까’라며 다소 무책임한 대사를 내뱉는다. 글램핑 사업 담당자인 타카하시, 마유즈미는 마을의 환경과 문화를 겉으로는 이해하고 존중하는 척하지만, 문제의 본질에는 전혀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그들은 철저한 외부인의 관점에서 마을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글램핑장 추진 사업 설명회에서 자신을 우동 가게 주인이라 소개한 한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마을에 온 지 얼마 안 됐다. 내가 이 마을 소속의 사람인지 이방인인지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당신들(타카하시, 마유즈미)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관람하며 이방인에 더 가까운 두 사람이 마을 내부로 들어오기 위해 애쓰는 구도가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졌다. 특히 타카하시, 마유즈미, 이 두 사람의 캐릭터성이 입체적이면서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은 글램핑과 전혀 연관성이 없는 연예 기획사에 재직 중이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사업 지원금을 얻기 위해 얼떨결에 글램핑장 추진 사업의 담당자가 된다. 첫 사업 설명회를 부정적으로 끝마친 타쿠미, 하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다시금 마을로 떠난다.
이때 두 사람이 마을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은 굉장히 흥미롭다. 타카하시는 훗날 결혼 후 꾸린 가정과 함께 시골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겠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추진한 사업인 글램핑장의 관리자가 되겠다며, 여느 평범한 중년 남성의 노후 계획과 비슷한 바람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외적으로 봤을 땐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가 사실 랜덤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이성과의 인위적인 만남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처럼 두 사람은 마을 내부에 속해 있을 때 혹은 마을로 향하는 길목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일을 겪게 된다. 특히 인사치레로 진행됐던 사업 설명회는 의도치 않게 마을 주민들의 거센 반발만 더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글램핑장 설치 문제는 한 마을 주민들의 생계가 달려있는 일이다) 누군가에겐 그저 넘어갈 수 있는 일이어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달려있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두 사람은 타쿠미가 그저 마을 심부름업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한가할 거라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그에게 글램핑장의 관리자 자리까지 제안한다.
앞서 말한 소속감을 따져보았을 때 그들은 은연중에 자신들이 타쿠미에게 직위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도시와 시골의 경계선을 더욱 명확히 구분 짓는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타카하시와 마유즈미 역시 유행병이라는 거대한 재해로 인한 피해자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들이 살기 위해 추진하려는 사업 또한 명백히 시골 마을의 자연을 해쳐 또 다른 피해자를 양성하는 행위가 된다. 이는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 즉 위에 머무르는 이의 영향이 아래 존재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친다는 구조를 거대담론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팬데믹이 발생한 시기에도 그로 인한 피해는 계층별로 다르게 나타났다. 취약계층에 속한 사람일수록 팬데믹으로 인한 피해가 더 큰 것이 사실이다. 모두에게 공평한 재앙이라고 불렸던 코로나 피해도 결국 속한 집단과 직위에 따른 차이가 존재하는 게 오늘날의 현대 사회다. 재해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또 다른 피해자들을 양성하는 구조라면, 이건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줄곧 보여주던 자연물은 이러한 인간이 형성한 사회 구조의 모순과 대비되며 오히려 더 선명하고 뚜렷해진다.
왜 제목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일까?
그렇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두 사람을 함부로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애초에 절대적인 악과 절대적인 선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걸까? 영화에서 타쿠미는 사슴은 절대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을 주민들의 심부름꾼을 자처할 만큼 마을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해 보이는 그의 말을 모두가 믿었다. 하지만 예외를 간과하는 이들은 늘상 존재한다. 사슴은 절대 사람을 해할 수 없다는 법칙, 이 법칙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예외. 바로 자신이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깨달은 순간, 최대한 반항한다는 것이다. 이 법칙이 깨지는 순간 모든 비극이 일어난다. 사냥꾼의 총을 맞은 사슴의 어미는 하나를 공격했고 타쿠미는 남자 직원의 목을 졸라 살해를 시도한다. 더 이상 어디에도 도망칠 곳이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마치 외부인의 공격이라도 받은 것마냥 혼신을 다해 그의 목을 조르던 타쿠미의 모습은 어딘가 처절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마지막 시퀀스는 하늘 위로 뻗은 겨울 나뭇가지들은 낮게 담아낸 오프닝과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다. 겨울 낮과 밤이 품도 있는 깊이는 분명히 다르다. 어두운 겨울의 숲은 사라져도 아무도 날 찾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그런 곳이다. 다친 하나를 안아든 채 숲속 방향을 향해 내달린 타쿠미는 그렇게 어두운 자연의 품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린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