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의 퇴장 없이 연기를 한다거나 라이브 연주자들과 악기가 무대 위에 노출되는 것은 이전에도 봐왔던 무대 형식이었다. 그러나 무대 뒤 스크린의 자막이 살아 움직이거나 배우들이 지문까지도 말하는 형식은 처음 보았다. 되게 이질적이었고 실험극인가? 싶을 정도로 생경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올랐다. 무대를 무대답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이지? 연극, 뮤지컬과 같은 무대예술은 과연 다른 장르의 예술과 무엇이 다르지? 우리는 과연 무대의 어떤 요소를 보고 연극이라 말하는 것이지?
지난 4월 11일 종로구에 위치한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된 <견고딕걸>을 관람했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았다. 아래 팸플릿에 적힌 문구처럼 견고딕걸 김수민 양이 주인공인 무대였다. 견고딕체에서 느껴지듯 딱딱하고 시크한 느낌의 고딕 메이크업을 한 김수민 (배우 서지우)은 실제 이야기 안에서는 생긴 것과 다르게 여리고 섬세한 싱어송라이터 지망생이다! 연극의 줄거리는 흔치 않지만 종종 있어왔던 소재, '가해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김수민의 쌍둥이 동생 수빈은 전철에서 한 사람을 밀고 자살을 한다. 그리고 남겨진 가족 견고딕걸 김수민, 엄마 최진희, 아빠 김우철의 이야기가 흘러간다.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견고딕걸> 팸플릿과 폐쇄형 음성 해설 기기
공연 <견고딕걸> 시작 전 객석과 무대 (자막해설을 제공하는 스크린이 보인다)
어떤 면에서는 공연은 소설 같았다. 인물의 대사뿐 아니라 지문도 내레이션 형식으로 읊어지다 보니 마치 한 편의 소설 낭독회를 보는 듯했다. 연극의 요소 중 하나인 '약속장치'를 활용해 배우들은 무대 위 단순한 소품과 의자만을 가지고 이 인물, 저 인물이 되었다가 또는 무대는 이 공간, 저 공간이 되곤 했다. 즉 '무대'라는 한계가 시공간을 넘나들게 만드는 가능성을 낳았다. 한정된 space가 오히려 상상의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또 어떤 면에서 공연은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영상 같기도 했다. 한 프레임 안에 많은 것을 꽉꽉 채워 넣듯 <견고딕걸>의 장면 하나하나는 버릴 게 없이 꽉꽉 채워졌다. 배우의 연기면 연기, 음악은 라이브로 심지어 뒤에 스크린을 활용한 자막과 영상도 하나의 소품이 되었고 쉴 새 없이 들리는 배우의 내레이션은 카메라라는 장막 뒤에서 많은 것을 설명해야만 하는 영상과 닮아있었다. 영상은 카메라로 신체 감각을 한번 거르기 때문에 영상에 여백과 호흡이 길면 사람들이 쉽게 지루해한다. 그러나 무대는 아니다. 그래서 무대만의 요소를 생각해 보면, 호흡과 여백이 있었지라는 점이 문득 떠올랐다.
그렇다면 <견고디걸>은 무대공연이 아닌가? 필자가 너무 보수적으로 생각하나? 무대를 무대답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다고 스스로 너무 틀에 가둔 건 아닐까? 예술은 그 장르와 양식에 관계없이 할 일을 그저 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질문까지 나아갔을 때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배리어 프리 Barrier-free 공연"
'배리어 프리'란 장애인, 고령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제약, 장벽 없이 일상생활 및 여가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 등을 일컫는다. 비장애인을 표준으로 제작되고 설계된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문화여가생활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을 포함한다. 공연에서는 자막이나 수어 통역, 음성 해설 등을 통해 공연 관람을 돕는데, 견고딕걸에서는 위 사진과 같이 일부 회차 음성해설(기기)과 전 회차 스크린 자막 해설을 제공하고 있었다.
<견고딕걸>에서의 특이점은 아래 사진처럼 스크린의 자막이 마치 한 명의 배우처럼 연기를 한다는 점이다. 스크린 위 움직이는 자막은 청각장애인에게는 보다 신체적으로 감각이 와닿을 수 있는 공연 관람을, 비장애인에게는 무대미술로서 연출적인 재미로 작용한다. 모두가 고려되는 공연인 셈이었다. 누구를 위한 자막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자연스러운 연출이었다.
공연 <견고딕걸> 中 한 장면
솔직히 필자는 무대 위의 장치들이 너무 과하다 생각했었다. 끊임없이 발화되는 지문, 끊임없이 떠오르는 자막들. '호흡과 여백'이라는 무대의 맛이 없다고만 생각했던 필자의 편협함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나에게는 모든 게 들리고 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무대라는 제약이 있기 전에 신체적인 제약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대공연은 신체적인 감각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장르이다. 그래서 무대공연은 장애인들에게는 유달리 장벽이 높다. 그러나 <견고딕걸>과 같은 공연의 연출로 깨달았다. 배리어 프리 서비스를 이렇게 공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면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에게도 서로 눈치를 보지 않는 자연스러운 공연, 자연스러운 세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말이다.
어딜 가나 장애인을 위한 장치가 '서비스'가 아니고 시스템적으로 '당연히' 함께 있는 풍경이 만들어지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섞여 살 수 있지 않을까? 문화예술을 나는 이렇게도 편하게 관람하면서 배리어 프리, 배리어 프리라는 말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호기심과 신기함의 의도가 아닌. 정말 입장 바꿔놓고 말이다. 최근 '한계'라는 지점이 창의성을 발휘해 준다고 생각한 터였다. 기술의 발달로 한계 없는 세상, 무한한 가능성이 도처에 있는 세상에서 '한계'가 이제는 있어줘야 할 때라고 생각한 터였다. 그러나 아직도 어디선가 한계, 장벽이 있는 사람이 도처에 있고 진정한 한계가 실은 있어본 적이 없었던 나의 당연하고도 자기중심적인 관점이 <견고딕걸>을 너무나도 편협하게 바라봤다 생각하니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공연 <견고딕걸>의 커튼콜 (왼쪽부터 박세정, 임예슬, 서지우, 문가에, 김채원 배우)
공연 시작 전 배우가 무대 위에 올라와 가장 큰 소리, 가장 밝은 빛에 대해 안내해 줬던 장면이 떠올랐다. (3초 뒤 가장 큰 소리라 언급하면서 실제로 들려주고 가장 밝은 빛이라 하며 실제로 조명을 켜주었다) 신기한 게 아니었다. 당연한 거였고 일전에 다른 공연에서 예고 없이 울려 퍼졌던 큰 욕설과 소리와 빛이 나에게도 매우 자극적인 점을 떠올렸 때, 이러한 안내는 과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모두를 위한 공연이 이렇게나 어려운 거였나. 점점 편리해지기만 하니까 사람들은 조금만 불편해도 화를 내고 빨리 해결해버리려고 한다. 누구나 배달앱으로 쉽게 배달을 시키고,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고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세상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자연스러움도 권력이라는 걸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물론 모든 일이 그렇듯,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냥 단순히 방해가 되니까 제치고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모습이 앞으로의 풍경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끝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누구나 이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를 관람할 수 있는 권리는 있으니까. <견고딕걸>은 끊임없이 깨어있도록, 무뎌지지 않도록, 그래서 더 다양한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스스로를 다짐하게 만드는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