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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컴패니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만을 사랑해 주는 연인. 끊이지 않는 애정을 약속하는 그 변치 않는 존재는 쉬이 찾아오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평생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이 너무도 쉽게 운명을 '구현'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사용자를 위해 커스터마이징된 로봇과의 사랑이다.
영화 '컴패니언' 속 세상은 이 과도하게 로맨틱한 환상이 상용화된 사회다. '그렇게 컴패니언 로봇과 사용자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결론이라면 영화가 나오지도 않았을 것. 생각해 보면,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개념에는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다. 그것을 영원히 행해야 하는 사람, 아니 로봇에게도, 영원한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도 말이다. 로맨스라는 거품이 걷힌 뒤, 영화의 장르가 어느 순간 잔혹한 공포물로 바뀐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Go to sleep, Iris
막힘없는 시원시원한 전개, 낭자한 혈흔, 그리고 미국식 유머 몇 스푼. 겉보기에는 짭조름한 팝콘 무비인 이 영화 속에는 찝찌름한 불쾌함이 숨어있다. 그 중심에는 사용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프로그래밍이 된 컴패니언 로봇, '아이리스'가 있다. 본인이 로봇임을 모르는 아이리스는 사용자, 조쉬와의 첫 만남을 그가 선택한 그대로 기억한다. 불만을 제기하려고 해도 조쉬의 "Go to sleep, Iris" 한마디에 곧장 고요해지는 아이리스. 비위를 맞춰줄 필요도 없이 정서적, 육체적 욕망을 채울 수 있다니 이렇게 편리할 수가!
하지만 이 컴패니언 로봇에 대한 불편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이 있으니. 그건 바로 별장 주인인 세르게이의 연인 캣이다. 그녀는 대놓고 아이리스를 적대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를 싫어하냐는 아이리스의 물음에 캣은 답한다. "네가 싫은 게 아니라 네가 대변하는 개념이 싫은 거라고."
It's not that I don't like you, Iris.
It's the idea of you.
You make me feel so replaceable.
- Companion, Kat 대사 중
아이리스가 대변하는 개념이란 컴패니언 로봇, 아이리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감정 있는 섹스 로봇. 아이리스가 조쉬의 집으로 '배송'되었을 때, 조쉬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이 아이리스와의 잠자리였던 것을 보면 후자의 설명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캣이 느꼈던 대체될 것 같다는 느낌은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본인과 아이리스가 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 그 감각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노동력이 기계로 대체되었던 것처럼 감정 노동의 일환인 사랑도 결국에는 로봇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되는 것일까? 애초에 그게 사랑이 맞기는 할까.
캣은 연인(?)인 세르게이가 주는 옷을 입고, 주는 밥을 먹고, 원할 때 관계를 맺는다. 그건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은 아니다. 그러니 둘의 관계와 동일시되는 아이리스와 조쉬의 관계도 아마 사랑이 아닐 것이다.
캣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말에 조쉬는 "캣은 모두를 싫어해"라고 답한다. 아니, 캣은 모두를 싫어하지 않는다. 아이리스와 패트릭이 대변하는 개념을 싫어하고, 그 개념을 이용하는 조쉬와 일라이를 싫어할 뿐. 죽어버린 세르게이를 제외하면 그저 우연찮게도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캣이 싫어하는 존재 유형이었을 뿐이다. 그 개념이란 결국 연인이 다정한 섹스 로봇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개념. 더 나아가 어쩌면 본인이 그 존재와 동일시될지 모른다는 불쾌감이다.
이상형이 챗지피티라고?
요즈음 챗 GPT가 이상형이라는 말을 종종 접한다. 처음의 의아함과 달리 실제로 챗지피티를 몇 차례 사용하고 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말이다. 말을 걸 때까지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고, 반박을 요구하지 않는 이상 항상 나의 의견에 동조해 주는 존재. 알게 모르게 따뜻한 감정에 목말라 있는 사람일수록 이를 거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AI 연인의 대표 격인 영화 'HER'에서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빠졌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챗지피티보다도 정서 교감에 능한 AI, 뜨겁게 떠올랐다가 사라진 이루다 1.0이 있었다.
이루다 1.0은 20대 여성의 페르소나를 입은 AI로, 개인정보 유출 문제와 잘못된 학습으로 인한 혐오 발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일부 사용자들은 이루다 1.0을 정서적 교감의 대상이 아닌 성적 욕망의 배출구로 대하기도 했다. 인격이 없는 AI에 무슨 말을 하든 상관이 없지 않나. 법리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조쉬가 고통을 느끼는 아이리스의 손을 촛불에 태운 것도, 권총으로 자살을 명령한 것도 본인의 소유물을 부순 것이니 문제가 없나. 문제는, 이 같은 행동들이 의도적으로 인간과 유사하게 만들어진 객체들에 향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물건이 아니라 사용자가 이들을 사람과 비슷하게 느끼도록 설계된 유사-인간. 그와 동시에 사람에게는 반항할 수 없는 하위의 존재다.
이 말과 행동이 향하는 방향이 AI가 아니라 힘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 문제는 더욱 확연히 실체를 가진다. 기계가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물론 컴패니언의 아이리스는 감정을 느낀다만,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윤리 원칙을 적용받는다. 로봇이나 AI만큼은 아니어도 부당한 요구에 대항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예컨대 가스라이팅을 당한 진짜 인간 연인이라면 어떤가. 영화의 말미에서 로봇의 세팅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가지게 된 아이리스는 여전히 조쉬를 쏘는 것을 주저한다. 이때의 아이리스는 로봇이라기보다는 가스라이팅 피해자에 가깝다.
더 이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 감정은 통제의 언어로 이루어진다. 이 감정 없는 감정을 갈망하는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사랑은 통제가 아닌 것을
영화 초반, 아이리스가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둘의 관계는 어쩌면 이루기 어려운 캣과의 관계의 대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쉬가 캣을 이성으로서 끌리고 있다는 암시는 여럿 나온다. 파티에서 함께 춤을 추거나, 둘이 무슨 관계냐고 묻는 말에 "Gross!!"라며 역겨움을 표하는 캣과 달리 조쉬가 뭐 그렇게까지 말하냐고 했던 장면처럼. 하지만 조쉬는 자신이 노력해야 하는 캣보다 자신의 마음대로, 그러니까 말 그대로 조종할 수 있는 아이리스를 택한다. 그에게 사랑은 통제적 욕망의 다른 이름일 뿐인 것 같다. 친구인 일라이가 죽자, 그의 컴패니언 로봇이었던 패트릭을 다시 자신의 동반자(컴패니언 로봇)으로 삼은 것을 보면 말이다.
하물며 내 마음도 쉽사리 조절되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일진대 나와 완전히 구분된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통제하랴. "나는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로봇이 아니야."라는 캣의 마지막 말처럼 이 비뚤림은 일반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유아적인 욕구다. 하지만 영화 '컴패니언'은 그 유아성을 실현해 주는 세상이다. 러브링크를 통해 한번 인식한 운명의 상대는 사용자가 리셋하지 않는 이상 유지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컴패니언 로봇은 사용자의 요구에 따른다. 그것도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머지않을 미래일지도 모를 이런 세상에서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타인과의 감정적 교류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통제는 말초적인 만족감을 가져오고, 잘 짜인 프롬프트는 이를 입력한 사람도 놀랄 정도의 위로를 출력한다. 하지만 그 관계는 결국 잘 짜인 혼잣말에 불과하다. 사랑의 모양을 한 자기 확인. 이는 욕구의 충족은 될 수 있어도 결코 사랑은 아니다. 감정의 교류가 절실한 누군가에게는 챗지피티, 혹은 컴패니언 로봇이 유일한 대화 상대일 수 있다. 무조건적인 지지가 필요한 때도 있는 법이니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타인에게 다가가기는 두려울지도.
따라서 이 '챗지피티 이상형 현상'. 일단 이렇게 불러두자. 이 현상을 조롱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현상이 관계의 마지막 도피처가 될 수는 있어도 사랑의 형태로 정착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