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가 어려웠다.
물론, 많이 접해보지 않기도 했다. 유명인의 추천으로, 혹은 음악 영화나 방송의 한 프로그램, 또 라디오의 음성으로 접한 것이 전부니까. 즉흥으로 합을 맞추며 불협화음과 절정을 오가는, 여타 클래식만큼의 긴 시간은 내게 도저히 미디어로는 와닿지 않는 음악이었다. 재즈란 창의성이 높은 장르다. 높은 확률로 대중성과 반비례한다는 그 창의성.
그러므로 마티스 피카드의 내한공연은 내게 두 가지의 기회였다. 첫째, 입장권을 사 술 한잔 걸치고 시시콜콜한 담소를 나누며 듣는 재즈 무대가 아니라는 것. 언제나 배경음악으로만 들었던 재즈에 정말, 오로지, 집중해야 하는 기회 말이다. 두 번째는 좀 더 사적인 이유다. 잘 모르는 것을 소중한 사람과 함께 경험해야 한다면 최고여야 한다!
나는 아무런 지식도 쌓아두지 않고 마티스 피카드의 공연으로 향했다. 뭔갈 공부하고 가는 것보단 온몸으로 경험해 보는 게 좋았다. 혹여나 미리 배운 지식이 감상에 방해가 되어선 안 되었다.
공연장은 연주자와 관객이 '소통'할 수 있는 정도의 적당히 아담한 규모였고, 음향도 나쁘지 않았다. 동행인은 내게 재즈 애호가들은 함께 허밍으로 연주의 즉흥을 따라 하기도 한다며 귀띔했다. 나는 그것을 반농담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공연 문화야 음악 성격마다 다르긴 하다만, 락 공연도 아닌데 그런 식의 자유로운 행동이 괜찮을까? 일명 '시체 관극'처럼, 극도로 조용한 문화가 더 익숙한 내게는 그 말이 꼭 서양인의 영화관 리액션처럼 먼 이야기로 느껴졌다.
얼마 안 가 공연이 시작됐다. 무대 조명이 켜지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연주자가 들어왔고, 음악이 곧장 시작되었다. 몇 분 안 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바로 동행인의 말이 사실이란 것이다. 아니지, 사실을 뛰어넘었다고 해야 한다. 관객들은 음악을 감상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즐길 뿐!
음악의 흐름에 머리를 흔들고, 손을 휘젓거나 손뼉을 치고, 환호를 지르고, 또 허밍으로 연주자와 동화되는 광경이란 재즈 공연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장면일 것이다. 우리가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무대 위 아티스트는 더욱 힘을 받아 휘몰아쳤다. 특히 마티스는 자주 호응을 유도하거나, 또 재미있는 광경을 보여주는 등 무대를 자유롭게 즐겼다. 그는 꼭 한국에 오래 있던 영어 강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위트를 섞은 적당한 속도의 쉽고 정확한 표현들은 관객들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지 않게 했다.
홀 안에 있는 모두가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음악에 몸을 맡기는 모습은 내게 재즈라는 음악의 아름다운 점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느끼게 했다. 보는 음악도, 듣는 음악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의 세트리스트에 있던 한 곡의 제목처럼, 일종의 명상같았다. 우리는 재즈로 호흡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엄청난 실력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이 끝나고 전단을 보는데 한 명 한 명의 경력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천재들이더라. 한편으로 안도했다. 그들이 천재들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편견을 갖고 이 공연장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어떤 공연이 되더라도 "역시 천재들은 달라~" 로 퉁치고 끝났겠지. 무지는 감성 만큼에는 도움이 된다.
모든 음악이 완벽히 재미있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재즈 왕초보니까. 어떤 부분은 조금 지루했고, 원래 이런 화음이 나도 되는 걸까? 하는 구간이 몇 초 있기도 했다. 그것이 매력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작은 부분들이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즐거웠다는 사실이다. 눈짓만으로 시작과 끝을 알 수 있는 재즈 동료들의 유대, 그러면서도 멤버 개개인만의 독특한 박자감은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특히나 더 오래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