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이야기들>은 발터 벤야민이 노벨레의 형식을 갖춰 집필한 글과 문학적 테마가 있는 짧은 글들을 묶은 이야기 모음집이다. 이야기들은 대도시 생활에 감도는 에로틱한 긴장감, 꿈과 몽상, 이동과 여행 중에 발휘되는 상상력, 어린아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언어의 가능성과 유희 등을 아우르며 벤야민이 사는 내내 천착한 철학적 주제들을 품고 있다.
미끄러져 들어간 이야기 속에서 벤야민 특유의 섬세한 시선과 문학적 감수성, 사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완결이 없이 작게 조각난 이야기들은 마치 꿈의 잔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 같지만, 어쩌면 이론서보다 더 분명하게 벤야민의 영혼을 이 잔해 속에서 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고독’이라는 글자다. 어째서 이 모든 이야기들이 ‘고독의 이야기’라는 글자 아래 묶이게 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 책을 비추는 특유의 멜랑콜리와 존재의 불안, 고독의 분위기는 평생 동안 어딘가에 흡수되지 못한 그의 삶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닐까.
그는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독일을 떠나야 했고, 망명자 신분으로 프랑스, 스페인 국경을 떠돌았다. 친구였던 아도르노, 브레히트, 크로체 같은 이들과 가깝게 지내면서도 늘 어떤 ‘거리감’을 유지했다. 진정한 사랑에도 실패했으며 안정된 결혼 생활마저도 좌절됐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는 고독이라는 단어와 꼭 맞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그가 고독을 느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는 그의 방랑하는 정신은 그로 하여금 현실과 꿈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게 했다. (결국에는 그 문턱이 반질반질해지고 말았다.)
<실제로 걷고 있는 게 아니지 않을까, 그저 걷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 41p
<그러나 이 단어들에 나를 의탁하려는 순간 나는 이미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꿈에서 깨어남으로써 꿈의 과녁을 정할 수 있었던 다른 때와 달리, 그때 나는 알아버렸던 것이다. 깨어남으로써 과녁을 지나가벼렸다는 것을.> - 90p
책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현실과 꿈의 경계 그 순간에 생겨난 그의 정신이다. 꿈속에서 걷고 있는 것인지, 현실에서 걷고 있는 꿈을 생각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꿈과 현실의 문턱이 너무 닳아 버려 현실로 돌아온 후에 깨어남을 인식해야 하기도 한다. 이 현실의 감각을 회복하려는 모습은 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지나온 시간의 지점과 지구라는 공간의 좌표에 위에 자신을 고정하려던 프루스트의 인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관계의 양상이 전부 달라졌다. 따로따로 있던 것이 전부 풍경의 일부, 큰 그림의 부분이 되었다. 이 모든 것에서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명료해져야 한다는 절박함이 공포에 질린 그를 엄습했다.> - 38p
현실 세계의 대상들은 있을 법한 각자의 위치에 놓여있고 나는 언제나 그 공간 사이로 들어갈 수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모든 사물들이 비집고 들어갈 하나의 틈도 없는 거대한 그림이 될 때는 그처럼 숲 속으로 뛰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온갖 나무들과 충돌하면서···.
그리고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고독의 이야기들 속에 스며있는 희미한 희망이다. <저녁의 목신> 의 이 부분은 책 전반을 비추는 은은한 희망의 빛이 어디로부터 흘러나오는지 알려준다.
<그가 방금 밟고 지나온 길 위에서는 그가 아닌 누군가, 회색의 누군가가 벌써 그의 발자국을 지우고 있었다. 그의 발자국이 원래 없었던 것 처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 숲 길을 지나가듯 다른 누군가도 지나간다는 것을. 앞서 간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 마법, 아는 장소, 아는 사람들이 새로운 장소, 낯선 사람들이 되는 마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 37p
그는 이 글을 통해서 과거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은 나의 발자국을 원래 없었던 것 처럼 지우고, 아는 사람들과 장소는 낯선 것이 되어버린다. 나는 계속해서 미래로 밀려난다. 하지만 '앞서 간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앞서 간 사람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나를 구원한다. '과거의 고통'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잊힌 진실들과 함께 현재를 구원하러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