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딕. 너무 두껍고 투박해서 좋아하지 않는 글씨체다. 수민은 그런 견고딕체를 닮은 소녀, 견고딕걸이다.
차림새만 보면 거침없는 사춘기인가 싶을 수 있지만, 수민은 사실 너무나 무겁고 흔치 않은 상황 속에 있다.
극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수민의 쌍둥이 '수빈'. 밝고 평범한 학생이었던 수빈은 어느 날 친구 '지은'을 죽이고 자신도 죽어버렸다. 그 이후 수민과 부모 '우철', '진희'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잔인하다. 외부의 시선과 비난에서 오는 고통도, 그들의 내적인 갈등에서 오는 고통도 견딜 수 없이 극심하기만 하다.
이 극은 진희, 우철, 미나, 현지, 수민까지 다섯 인물의 복잡한 심리를 명료하게 담아냈다.
진희와 우철의 시점은 길지 않게 다루어짐에도 인상적이다. 진희는 '왜?'에 매달린다. 그 한 글자가 그렇게 처절하다. 원망과 죄책감에 수빈을 외면한다. 반면 우철은 현실을 외면해 버린다. 그 무엇도 돌아보지 않으려 한다. 둘은 서로의 방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멀어지지만 괴로움의 무게는 같다.
'미나'와 '현지'는 지은에게 각각 각막과 심장을 기증받은 친구들이다. 미나는 수민과 현지를 설득해 지은의 부모님께로 향한다. 둘은 그 과정에서 수민의 견고함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장본인들이다. 수민의 뒤에서 부족하게나마 함께 서 있어 주고, 달려준다.
수민의 내면은 가장 복합적이다. 자신에 대한 의심, 수빈을 대신해 느끼는 죄의식, 수빈에게 오랜 시간 속아온 것 같은 미움, 그러나 그리운 마음 등이 끔찍하게 뒤섞였다. 지은이 죽은 곳에서 따라 죽으려고도 해보고, 수빈과 똑같은 얼굴을 성형으로 바꿔버릴 생각도 한다.
하지만 미나, 현지와의 여정 끝에 수민은 다른 선택을 한다. 박지선 극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비극 속에서 용서를 구하는 행위는 결론이 아니라 시작점'임을 밝힌 바 있다. 마찬가지로 이 공연의 엔딩은 이야기가 끝남으로써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는 엔딩이다.
열여덟 수민에게도 그녀를 웃게 하는 꿈이 있다는 사실, 검은색 대신 다른 색 옷을 내심 입고 싶었던 듯한 모습 등이 뭉클했다. 그녀가 구멍 끝에서 꼭 다른 구멍을 찾아 나가길, 구멍이 무덤이 되지 않길 바라게 되었다.
이렇게만 보면 무거워 보이지만, 사실 이 공연의 정수는 연출에 있기도 하다.
같은 스토리여도 연출에 따라 작품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지기 마련이다. 무거운 이야기를 무겁게 전하는 것도 좋지만, 한껏 경쾌하게 전하는 것도 좋다. 단순히 가벼운 포장지에 담아 전달만 하는 게 아니라, 그 두 느낌이 결합해서 하나의 새로운 덩어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우선 배우들이 상당히 '연극적인' 연기를 하는 장면이 많다. 콩트처럼 과장해서 합을 맞추는 장면들이다. 초반부 싱크홀-블랙홀-맨홀로 이어지는 구간이 특히 생소할 수 있지만, 보다 보니 빠져들었다. 그 외에도 대사의 호흡이 빠르고 장면 전환이 잦은 편이다. 대화만큼 내레이션도 많아, 희곡의 해설과 지시문을 그대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무대 뒤편의 라이브 밴드가 여러 배경음악과 효과음을 쉼 없이 깔아주기도 한다. 연극을 보면서 공연 자체가 굉장히 리드미컬하다는 인상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또, 이색적인 시도가 많아 관객이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며 극을 지켜보게 한다. 배리어프리 자막이지만 중요한 자막은 크기나 기울기를 다르게 해서 그 자체로 하나의 무대장치 같은 효과를 준다. 우철과 펭귄 장면 등 판타지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영화로 치면 이원석 감독의 스타일이 떠올랐다. 깊이 파고든다기보다는, 멀리 쭉쭉 나아감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그러한 연출적 특징의 장점이었다.
종합적으로, 견고한 비극에 얹어진 리듬 한 스푼이 이 공연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내용도 연출도 독특하고 유려한, 거칠지만 눈이 가는, 견고딕을 닮은 공연 <견고딕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