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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6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SNS를 사용한다. 2010년 처음 출시된 인스타그램이 15년 만에 이용자 수 20억 명을 돌파했다고 하니 그 폭발적인 성장세를 짐작해볼 수 있다. 어릴 때부터 SNS를 놀이처럼 접하며 자란 세대가 성인이 되었을 만큼 시간이 지난 오늘날, SNS는 더 이상 혁신이 아니라 삶의 일상적인 풍경 중 하나다. 온라인은 현실의 보완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이 되어버렸고, 우리는 어느새 24시간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 익숙해졌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며 우리가 타인과 관계 맺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큰 전환점을 맞고 있다. 이런 시대에 테이지 하야마의 개인전 제목이 'Transition: 전환(轉換)의 시대'인 것은 시의적절하다. 1975년 일본에서 태어나 현재는 스위스에서 거주하며 활동하는 그는 이번 전시에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한국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으로, 그의 새로운 회화 시리즈를 만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강렬한 원색의 그림들이 반긴다. 모두가 초상화인데, 자연스러운 일상의 색이 아닌 초록, 빨강, 검정처럼 채도 높은 색으로 그려져 있다. 처음 보는 작품인데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각 인물들의 머리스타일이나 의상, 포즈가 우리의 기억 속 어딘가에 자리한 상징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배트걸, 엘비스 프레슬리, <스타워즈>의 레아 공주... 20세기 미국 대중문화의 편린 같은 이 그림들은 아직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집어삼키기 이전 시대에 선전물이나 옥외광고에 쓰였을 것만 같고, 살아보지 않은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익숙한 이미지들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이질감이 느껴진다. 초상화의 눈, 코, 입 같은 세부는 어딘가 다른 데서 오려 붙인 것처럼 콜라주 형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볼 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초상화 속 인물의 정체는 막상 그림 앞에 서자 모호해진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여러 레이어가 중첩된 듯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장노출 촬영으로 찍은 사진처럼 움직임의 궤적이 그대로 드러난 초상화도, 아예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가 유명 브랜드 로고로 대체된 초상화도, 기하학적으로 분리된 형상의 초상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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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 Card Elvis, 2025, 63x53, Oil on canvas

 

 

실제로 테이지 하야마는 방대한 이미지 자료를 축적한 다음 구도를 정하고 유화로 색채와 질감을 쌓아올리는 식으로 작업한다. 전통적으로 초상화란 특정한 개인을 묘사하기 위한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의 원본이 되는 특정한 사람이 애초부터 없었다면, 그림으로 나타난 형상은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 시시각각 변하는 이미지, 메아리처럼 반복되고 중첩되는 과거를 뒤집어쓴 이미지에서 현대사회 속 우리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다. 온라인을 제2의 현실 삼아 살아가는 우리도 실체 없는 막연한 이미지에 불과하지 않을까.


인간이 때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다른 자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층위 속에서 자아의 분리는 훨씬 더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장려된다. '부캐'가 트랜드로 떠오른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이런 자아의 분리, 또 다른 자아의 등장은 해방감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불안감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온라인상에서 타인을 믿지 않는 것에 익숙하다. 다른 자기 자신으로 살다 보면 무엇이 진짜 나인지 자신조차 헷갈리곤 한다. 하루에도 수차례 한 자아에서 다른 자아로,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전환하며 우리의 마음에 찌꺼기처럼 쌓이는 것은 무엇일까.


신뢰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곳에서 적절한 유대감과 소속감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온라인은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모두가 연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지만, 그 환상은 쉽게 구현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갤러리를 둘러보면 두 사람 이상 그려진 작품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가 각자의 캔버스에 갇혀 있는 모양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세상만사를 다 본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맥락없는 파편일 때가 대부분이고 우리의 존재 자체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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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들의 또 한 가지 공통점은 선명한 색감과 달리 인물들의 표정은 어딘가 심통이 나 있고 지루해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무표정한 얼굴로 채팅창에 수십 개의 키읔을 연타하는 사람들 같다. 누구나 의미 없는 쇼츠를 보며 시간을 죽여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실시간으로 전 세계의 이슈와 밈을 수혈받는 '재미의 풍요' 시대에 사람들은 더 즉각적인 쾌락과 반응을 원한다. 단지 그것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거나 타인을 해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본다. 그러나 빠르게 얻은 쾌락은 지속되는 시간도 짧기에, 웃음은 언제나 다시 지루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끝난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수많은 모순과 역설로 가득하다. 그 어느 때보다 콘텐츠와 자극이 넘쳐나지만 정작 '볼 것'이 없어서 지루해하고,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외로운 사람들은 더 늘어난다. 수십 개의 자아를 가질 수 있지만 그중 선명하고 고유한 하나를 가꾸기란 어렵다. 자극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려는 인간의 본성이 기술과 만날 때, 긍정적인 변화가 생겨나기도 하지만 예상치 못한 파국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눈에 띈다. 최근에 등장한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러한 변화를 더 가속시키며 혼란을 더하고 있다. 전환의 주기는 점점 더 짧아져 이제는 전환되는 게 아니라 점멸하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일까. 아는 얼굴인가 싶지만 닮은 얼굴일 뿐이고, 고유한 얼굴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과거의 이미지와 각종 유행을 덧씌운 이미지일 뿐인 우리. 모두를 닮았지만 그래서 아무도 닮지 않은 초상화들의 모임이 'Transition: 전환(轉換)의 시대'에서 펼쳐지고 있다. 전시는 4월 26일까지 SH갤러리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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