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 <머니볼> <힘내세요, 병헌씨>. 나는 언제나 패잔병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딘가 모르게 항상 더부룩해 보이는 걸음걸이와 온종일 피워대는 담배. 목 늘어난 티셔츠와 꼬질꼬질 나이키. 패잔병의 습성이라는 이유로, 나는 거지 같음에 미학을 느낀다. 졌지만 지지 않은 그들은 언제나 연민의 대상이고, 상처와 희망이 공존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희망으로 귀결된다. 요컨대, 나는 더러워도 솔직한 게 좋고 못나도 꾸밈없는 편이 좋다. 그편이 보다 진실되고 희망차다. 그편이 보다 나답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또 졌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인데, 어느 순간 내 글이 팔리지 않는다. 소재 고갈로 똑같은 내용에 제목만 바꿔 이래저래 마감만 때우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미학 없이 그냥 거지가 될 게 빤하다. 폼생폼사인 나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패자 말고 패잔병이 돼야겠다. 망하더라도 멋은 좀 나야겠다.
패잔병은 전후 사정을 막론하고 ‘졌기 때문에’라는 슬픈 전제로 시작한다. 세상은 승자를 비추고 있는 가운데, 그러거나 말거나 억울하거나 분하거나 괴롭거나 취해있거나 쩔어있거나. 스스로가 만든 세계에 빠져 숙취에 허덕인다. <록키>를 보나 <머니볼>을 보나 <힘내세요, 병헌씨>를 보나 나를 보나 다들 그렇다. 패자는 승자로의 재기를 꿈꾸지만, 패잔병으로의 재기가 선결과제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세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자. 그들은 정말 갈 데까지 간 인간들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걸음걸이는 더부룩하고 담배 연기는 자욱하며 복장은 거지 같은 게 트름 냄새가 지독할 것처럼 생겼다. 그들이 바닥을 쳤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패자로 살게 한다. 패자는 연민이 아닌 휘발의 대상이고. 상처와 희망이 공존할 수는 있으나 결국은 상처가 도드라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 굴레서 빠져나오지도 삐져나오지도 못한다.
그들이 패잔병으로 재기하는 데는 또 하나의 바닥이 필요하다. 바닥에서 바닥으로. 두 번의 바닥을 마주해야만 한다. 쪽팔림이 무뎌지는 기술, 자존심을 삼키는 기술. 질투를 삭히는 기술. 자기혐오를 멈추는 기술. 기술, 기술, 기술 기술 타령만 하다 두 번째 바닥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곳은 정작 기술이 쓸모없는 곳이다. 본질만 남은 곳이다.
<록키>는 이기기보다는 버티기를 택했고. <머니볼>은 수용하기보다는 밀어붙이기를 택했다. <힘내세요, 병헌씨>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택했다. 화려한 잔기술 대신 정공법을 택했다. 그저 과거를 인정하고 현실을 인지하고 미래를 인내하기로 택했다. 걸음걸이도 그대로고 담배 냄새, 꼬질꼬질 나이키도 그대로인데 왠지 모를 개멋이 느껴지는 건, 그들이 결국 패잔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요는 무엇을 입었느냐가 아니고 누가 입었느냐다.
그러니까, 돌고 돌아 인생은 스스로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문제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차를 타고 어떤 대접을 받으며 어떤 위치까지 올라서느냐. 그보다는 어떤 미학을 추구하느냐가 먼저다.
나는 좀 더럽게 멋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