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작년 여름 영국에서 사 온 책 두 권을 발견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피터 팬’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들이다. 그래도 영문학도인지라, 영국에 가게 되면 책 한 권 정도는 사 오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는데, 런던 여행 중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마주친 게 반가워서 구매했었다.
이 글은, 그렇게 오랜만에 펼쳐봤던 책에서 발견한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더랜드 (Wonderland)
토끼 굴에 빠진 앨리스가 도착한 원더랜드는 모든 것이 혼돈 그 자체이다. 시간은 제멋대로 흐르고, 몸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동물들과 트럼프 카드가 말을 한다. 상식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런 황당무계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점점 이런 질문이 생긴다.
이해할 수 있는 것들과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나누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원더랜드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에겐 이상하고 기괴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들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즉, 이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내가 속한 세계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티파티를 기점으로 앨리스가 원더랜드를 대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더 이상 앨리스는 이곳을 이해하려 하거나 정의 내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드린다.
원더랜드에 도착하고부터 앨리스는 자신이 누군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런 그녀에게 챗셔 고양이와 애벌레가 던지는 질문은 꽤 철학적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정의 내리는 것은 결국 내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기도 하다. 원더랜드에서의 모든 선택은 앨리스가 직접 내려야 한다. 아무도 그녀에게 누구를 만나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앨리스는 결국 자신만의 논리로 원더랜드를, 그리고 현실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이는 곧 자아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자 성장을 의미한다.
네버랜드 (Neverland)
피터 팬이 사는 네버랜드의 아이들은 영원히 늙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현실의 책임도, 의무도 모두 잊고 자유롭게 뛰놀고, 꿈꿀 수 있다. 모험과 환상이 가득한 네버랜드는 말 그대로 ‘낙원’인 셈이다.
그러나 네버랜드는 영원히 머무를 수 없는 곳이다. 피터 팬은 네버랜드에서 아이로 남기로 하지만 웬디는 현실로 돌아가 어른이 되는 것을 선택한다. 둘의 이별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꼭 겪어야만 하는 이별과 상실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웬디는 현실로 돌아와 어른이 되기를 선택했지만, 피터 팬과 네버랜드에 방문했던 기억만큼은 잊지 않고 살아간다. 어린 시절의 꿈과 상상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실에서 요구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네버랜드와 피터 팬은 하나의 관념일지도 모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상징 그 자체 말이다.
아동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이처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오즈의 마법사’ 속의 오즈, ‘나니아 연대기’의 나니아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이런 가상의 세계를 터무니없고 비현실적이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다들 한 번쯤은 자신만의 세계를 가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책상 밑에, 방문 뒤에, 이불 안에 나만의 장소를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좁고 답답한 공간이었을 텐데, 그때의 나에겐 비밀 아지트이자 온갖 상상을 펼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란 건 없었다. 하늘을 날기도, 하고 우주여행도 떠나고, 초능력을 쓰며 악당을 물리치기도 하고, 상상 속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의 아지트는 나만의 원더랜드이자 네버랜드였다. 그때의 나는 앨리스이자 웬디였던 것이다.
그때보다 나이를 한참 먹은 지금, 나의 모험 얘기는 일기장에나 남아있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었지만, 그런 세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진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나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당신만의 원더랜드와 네버랜드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지금 당신에게는 어떤 세계가 존재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