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1일은 ‘세계 시의 날’이었다. 관련해 예스24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6년간 한국에서 1020 젊은 시 독자가 증가하는 추세다. 이와 함께 새롭게 주목받는 젊은 시인도 늘어가는 가운데, 이제야 시인도 그 흐름 속에 있다. 2023년 등단 10년 만에 낸 첫 시집 『일종의 마음』으로 ‘MZ세대의 시인’이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던 그가 지난 2월 두 번째 시집 『진심의 바깥』으로 돌아왔다. 이번 시집 역시 출간 한 달 만에 3쇄를 찍으며 사랑받고 있다.
『진심의 바깥』에는 섣불리 대상에게 덤벼들거나 자신의 격한 감정 속에서 길을 잃는 대신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화자가 있다.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것이 “끝나지 않는 장마를 볕이라고 믿는 것”(「순수한 모순」)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화자는 종종 ‘우리’로 자신을 칭한다. 냉소를 택하는 대신 “다시 믿어도 되는 이야기들”(「언덕 서점」)을 발견해낸다. 그렇게 그의 시는 단정하고 고요하게 독자 곁에 머문다.
우리나라 정통시를 이어가면서 자신만의 서정을 젊은 독자에게 전하고 싶다는 이제야 시인. 그를 지난 3월 26일에 만났다.
진심이란, ‘영원히 모를 마음’일지도
축하드려요. 『진심의 바깥』이 출간 한 달 만에 3쇄를 찍었습니다.
등단 10년 만에 큰 기대 없이 냈던 첫 시집 『일종의 마음』이 생각보다 좋은 반응을 얻어서 이번 시집을 낼 때는 부담이 되기도 했어요. 『일종의 마음』이 내가 아직도 시를 쓴다는 걸 스스로 되새기는 의미가 컸다면, 『진심의 바깥』은 전작을 좋아해 준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제게는 일종의 도전이었는데 많이 좋아해 주셔서 기쁩니다.
일종의 도전이라고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보통 시집과는 다른 새로운 형식이 돋보이기도 했어요.
세상에 없는 시집을 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집으로는 드물게 해설 대신 인터뷰를 싣고 시 중간중간 사진도 넣었죠. 사진에 대해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신데, 제가 직접 찍은 것들이에요. 평소에 어떤 생각이나 장면이 떠오르는 풍경을 사진 찍어뒀다가 나중에 그걸 보면서 시를 쓰곤 하거든요. 대표님과 디자이너님 제안으로 넣어 봤는데 이러한 시도를 독자와 문단에서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고민도 많았어요.
3쇄를 찍은 걸로 미루어볼 때 신선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은 듯해요. ‘진심의 바깥’이라는 제목도 그랬어요. ‘진심’과 ‘바깥’ 모두 어려운 단어가 아닌데, 붙여 놓으니 또 다른 의미가 생기는 것 같았어요.
시를 쓰며 진심이란 ‘영원히 모르는 마음’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일상에서 ‘진심’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과연 제대로 전해지는 진심이 얼마나 있을까요. 저는 거의 없다고 보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니는, ‘바깥’에 있는 진심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쓰는 시 역시 어쩌면 영원히 전해지지 않을 진심일 거예요. 우리는 끊임없이 자책하고 슬퍼하지만, 어찌 보면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 사실에 분노하거나 슬퍼하는 게 아니라 그저 담담하게 바라보는 느낌이 『진심의 바깥』 전체에 걸쳐 드러나요.
실제로 제가 무언가를 지켜보는 걸 좋아하고, 그게 시가 될 때가 많아요. 일상에서도, 여행을 가서도, 멀리 보이는 사람의 눈빛이나 몸짓을 지켜보곤 하죠. 누군가가 신문을 읽으며 변해가는 눈빛, 울음을 터뜨린 사람이 감정을 추스르기까지의 과정에 관심이 가요. 앞으로도 내가 너무 깊이 개입하지 않은 채 약간 떨어져 바라보는 장면을 시로 많이 옮기고 싶습니다.
진심이 전해지기 어렵다는 것 역시 그렇게 덤덤한 관찰 끝에 발견된 것인가요?
제 개인적인 경험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데요. 인간관계에서 상처도 많이 받고, 전달되지 않은 진심 때문에 자책하며 우리는 안 맞는다고 한탄하거나 상대방을 탓하곤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죠. 내 진심을 상대방이 몰라주듯 나 역시 상대방의 진심을 모른다는 걸요.
결국 우리는 서로를 몰라요. 그렇다고 진심이란 무의미하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걸까 생각하면 그렇게 답하긴 또 어렵거든요. 그래서 저는 ‘우리의 진심’보다는 ‘각자의 진심’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나’의 진심이 ‘너’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그래서 ‘우리’의 불가능성을 말하면서도 시적 화자로 ‘우리’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흥미롭기도 했어요.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 현실이라고 해도 우리는 진심을 전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존재잖아요. 너와 나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 내가 너를 사랑하고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진심을 표현하며 확인받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게 일시적이고 한 사람의 착각이라 할지라도요. 그래서 결국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우리’라고 생각했어요.
독자가 머물 수 있는 시를 씁니다
우리가 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시적 화자로 등장하는 작가님의 시를 읽으며 모순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시집에 실린 인터뷰에서도 무언가를 잊기 위해 시를 쓰지만 오히려 시로 씀으로써 그것을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모순을 말씀하셨죠.
기쁜 순간이나 보람찬 순간을 시로 쓰진 않아요. 대부분 외면하고 싶었던 일, 고통스러웠던 경험, 내가 나를 초연하게 바라봤던 순간에 관하여 쓰죠. 대부분의 시인이 그럴 텐데, 좋은 감정도 아닌 걸 왜 쓰냐 하면 그게 잊히지 않기 때문이거든요.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걸 그대로 갖고 있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데, 시어와 비유로 한 겹 두 겹 감싸면 조금 다른 형태가 되어 간직하기가 훨씬 수월해져요. 그래서 시를 좋아합니다.
시가 필름을 덧대어 이야기를 만드는 ‘그림자 극장’ 같다고 하시기도 했어요. 독자 중에는 시를 읽다가 작가님 시의 ‘원본’, 그러니까 시어와 비유로 감싸기 전의 무언가를 알아본 사람도 있지 않았나요?
첫 책을 내고 독자분들을 꽤 많이 만났는데 아직 한 번도 없었어요. (웃음) 이게 맞냐고 질문한 사람은 많았는데, 저는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봐요. 사실 그게 시를 읽는 이유죠. 시를 이해하지 말라는 말도 있잖아요. 나에게 이렇게 읽히고 너에겐 저렇게 읽히는 게 시예요.
읽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도 많은데, 작가님 시는 일상어를 사용해서인지 처음 볼 땐 비교적 쉽게 읽히고 곱씹을수록 의미가 깊어집니다.
요즘은 다양한 형식과 표현이 돋보이는 신선한 시가 많아요. 그것도 좋지만, 저는 쉬운 일상어를 시어로 활용하려 해요.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법한 단어를요. 누구나 화자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시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어떤 시는 시인 본인의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독자인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기도 하거든요.
물론 제가 쓰는 시는 일차적으로 제 세계에 관한 것이지만 독자가 그 세계에 머물 수 있는 여지, 틈, 빈 공간을 늘 열어두고 싶어요. 그러면서도 진부하지 않도록, 저만의 서정이 살아 있는 시를 쓰는 것이 앞으로의 제 숙제입니다. 그게 가장 나다운 시라고 생각합니다.
엘르 재팬(ELLE JAPON) 인터뷰에서 시류를 무작정 따르기보다 정통을 담고 서정을 전하는 시를 쓰고 싶다고 하시며 김소월 시인 이야기를 하셨던 게 떠오르기도 해요.
김소월 시인도 어려운 단어 하나 없이 운율을 이용해 시를 쓰신 분이에요. 많은 학자가 김소월을 두고 독자를 화자의 자리로 이끌어내는 시인이라고 평했죠. 당시 인터뷰를 준비하던 일본 기자가 김소월 시인의 시를 번역해 읽었는데 번역가에게 번역하기가 정말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대요. 그게 저한테 중요한 말이었어요.
어떤 면에서요?
김소월 시인의 시어처럼, 제 시어도 어느 나라에서나 통하는 단어이기에 소통이 더 쉽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실제로 제 기사가 잡지에 실리고 일본인 독자가 제 시를 번역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걸 봤어요. 그때, 제가 고집하는 정통과 서정, 일상적인 언어의 배열이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통을 빚어 시로 간직한다면
첫 시집을 내며 MZ세대의 시인이라고 주목받았고 이번 시집 역시 젊은 독자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최근 몇 년 사이 젊은 시 독자가 늘어난 것을 실감하시나요?
많이 실감해요. 심사에 참여하거나 수업을 해보면 확실히 20대 중에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늘었다는 걸 알게 돼요. 문예창작과 지원자도 늘어났다고 들었어요. 왜일까 생각해봤는데, 소위 ‘텍스트힙’의 영향인 것 같기도 하고요, 개성 강한 젊은 세대가 자기 자신을 표출할 창구로 시를 택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시 독자는 시집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이유가 될 것 같아요. 시집을 빌려 읽는 경우는 많지 않아 보이거든요.
그것도 공감해요. 시 독자들이 팬심이 있다고 해야 하나. 시라는 장르가 자신과 맞는 시인을 찾기는 어려운데, 일단 한 명 발견하면 그 다음부터 그 시인이 내는 시집을 꾸준히 사는 경우가 많아 보여요. 『진심의 바깥』도 이전 작품인 『일종의 마음』 독자들이 많이 사더라고요. 여기에 숏폼의 발달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시가 길지 않아서 바로바로 공유하기 좋으니까요.
한편으로 SNS에서는 시의 앞뒤 맥락 없이 한 구절만 소비되고 마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한데, 시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씁쓸하기도 하죠. 어떤 한 구절이 맥락이 제거된 채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도 종종 봐요. 물론 시는 읽기 나름이라고 앞서 말씀드리긴 했고 그게 또 시의 매력이지만, 전체를 함께 읽었을 때만 알게 되는 것이 분명 있기에 시 한 편을 통으로 읽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해요. 또, 시라는 게 단번에 한 구절만으로 마음을 울리기도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계속 곱씹을수록 여운을 남기기도 하거든요. 그런 부분도
이런 시대에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시 자체가 무언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들이 쓰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어느 시대든 시인으로 사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사 프로 방송작가 일을 하던 20대 때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접하고 충격을 받을 때가 많았어요. 그때 시는 제게 일종의 도피였지요.
시를 쓰는 마음이 더 깊어지고 사회를 좀 더 알게 된 30대에는 시 안에 개인적인 인간관계부터 사회적인 문제나 제도까지 담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지금 제게 시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나만 아는 언어로 쓸 수 있는 통로예요.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젊은 시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저는 시가 업인데, 북토크나 행사에 가면 업도 아닌데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요. 대체 시가 뭐길래 저렇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될까 놀라워요.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시를 대하는 마음이 겸손하고 조심스러워지죠. 오프라인 행사에 나가서 얻는 가장 큰 선물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입니다. 그걸 보며 시가 우리에게 필요하구나, 쓸모가 있구나 생각해요.
시를 사랑하는 분들께, 어느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하는 게 있다면 일기를 쓰듯 시를 써보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또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시어를 하나 갖고 있으면 좋겠어요. 보통은 아픈 것들이 시어가 되거든요. 누군가의 죽음, 나의 실패, 눈물…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면 이런 것들을 응축해서 하나의 시어로 간직해보세요. 고통은 지나면 시가 됩니다.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