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taught us that cinema could be about ideas as much as about emotions.”] – Martin Scorsese (마틴 스코세이지)
“그는 우리에게 영화가 감정뿐 아니라 ‘사유’를 담을 수 있다는 걸 가르쳐줬다."
누벨 바그의 대표적인 감독, 장 뤽 고다르에 대한 평가이다.
고다르의 사유하는 영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영화 운동인 누벨 바그(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 운동은 기존의 상업영화와 전혀 다른 형식, 철학, 제작 방식으로 영화에 대한 인식을 뒤집었다.
장 뤽 고다르는 현대 영화계의 위대한 거장으로 꼽히며 점프컷, 비연기자의 출연 등 그의 실험적인 도전들은 지금보아도 신선하고 매력적이게 다가온다. 그는 영화가 사유하게 만드는 것에 집중하며 정치적인 영화의 역할에 무게를 두었다. 실제로 그의 영화에는 정치적인 메시지가 강하게 드러나며, 영화로써 한계를 느낀 그는 <소니마주>라는 독립 제작사를 세워 더 짙은 정치성의 영상들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모습에 집중한다. 현실의 삶을 바라보고 문제를 파악하게 하는 영화의 특징을 가장 중심적으로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유하는 영화와 사회
실제로 영화와 같은 영상 매체는 어느 것보다도 쉽게 관객에게 의도가 전달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접근성이 좋기에 대중적이며 다수에게 빠르게 전파될 수 있는 힘을 가진 매체이다.
영화를 통해 사람들은 오락과 동시에 현실의 문제점을 실감한다. 봉준호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코미디와, 드라마가 담겨있는 스토리 속에서 결국 사회의 주요한 아젠다를 발견한다. 최근 개봉한 <미키17>은 노동자 착취에 대한 이야기를 <기생충>은 계급 불평등에 초점을 맞춘다. <옥자>는 환경 문제, <마더>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 혹은 가족/모성 이데올로기의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는, 대중들이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사회의 문제점들을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몰입감있는 전개 속에 꼼꼼하게 짜여진 장치들은 은밀하지만 확실하게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러한 영화의 사회적 역할, 감독들이 영화를 여기는 모습을 보며 비교적 라이트한 감상자인 내게 단순한 궁금증이 생겼다.
진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영화가 고급의 영화인가?
이 질문은 어느정도 나에 대한 성찰도 담겨있었다.
사유의 범위
80퍼센트 정도 맞는 답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20퍼센트의 여지는 진지한 사유라는 것의 범위에 대한 의문이다. 가벼운 생각을 넘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나 존재 가치 등을 깊게 탐구하는 '사유'의 대상은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이다. 꼭 거시적이고 사회적인 담론이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며 미시적으로 보아도 개인의 심오한 철학적 고민만이 사유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순히 개인적이고 소시민적인 감정의 부분까지 사유에 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정 중심의 로맨스 영화를 보며 사람들은 추억을 떠올리고 공감하고 위로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도한다. 현실과 사회에 대한 깊은 사유가 아닐지라도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동기와 목적성을 얻는다. 본질적인 공감과 자아성찰은 영화가 시작되고 발전된 이유이며 그렇기에 개인적인 층위의 사유가 얕은 것이라고 여겨질 수는 없을 것이다.
감상의 위계
고다르 감독의 영화적 도전이 깊은 사유를 가능케 했다는 것에 대한 반박은 아니다. 고다르의 영화처럼 철학적 사유 또한 실제에 필요하며 그의 덕에 영화를 통한 사유가 깊어지고 확장되었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글을 받아들일 때 고급과 비(非)고급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데에 익숙해진 모습을 목격하게된다. 나 조차도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예술을 향유하며 작품이 난해한지, 이 속에 담겨있는 고층위의 사회적 메시지가 무엇인지 먼저 파악하는 것이 우선된다. 난해하다고 비판하면서 그 난해한 작품을 즐길 수 있게된다는 우월감에 취하는 모순된 감정이 만연해있다.
위계적인 예술에 대한 태도는 지양되어야한다. 사회적 헤게모니를 전복하고 개인에게 철학적인 사유를 가능케하는 영화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감정적 위로와 즐거움, 새로움으로 누릴 수 있는 영화를 선호할 수 있다. 이러한 수용이 덜 사유적이라는 판단은 옳지 않다. 영화로 자신을 마주하기도 하고, 감정의 폭을 넓히는 것 또한 깊은 사유에 해당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며 사회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찾을 수도 있고, 영화를 통해 현실을 망각하며 잠시 해방된 상태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 둘이 반대의 개념 또한 아니며 하나의 영화가 모두를 수행할 수 있다.
영화를 싫어한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정 영화나 장르를 선호하지 않을 수 있지만, 영화 자체를 싫어하기란 어렵다. 그 이유는 다양한 영화를 받아들이는 다양한 수용방법이 존재하고 결국 다양한 사유의 기회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유는 통념적으로 거대한 것만이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다. 사유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그 대상을 대하는 태도,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