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빨래>는 2005년 초연 이후 지금까지 대학로에서 오픈런에 가까운 형태로 상연되며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초연 당시 이 작품에서 그렸던 서울의 모습은 당대 사회였지만, 이제는 과거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각자의 사연을 안고 서울로 모인 사람들이 ‘서울살이’ 이야기는 서울 토박이한테는 다소 먼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 작품의 넘버가 게시된 유튜브 영상에 들어가 보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 때면 이 작품을 찾으며 위로받는다는 댓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작품으로 시작해, ‘제2의 지하철 1호선’이라 불리며, 제11회 한국뮤지컬대상 작사상 및 극본상, 제4회 더 뮤지컬 어워즈 작사·작곡상 및 극본상을 받고, 해외 라이선스 수출까지 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뮤지컬 <빨래>. 어떻게 뮤지컬 <빨래>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스테디셀러로 남을 수 있었을까?
이 작품의 이야기는 ‘나영이와 그 주변 인물의 서울살이기(記)’라고 할 수 있다. 강원도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5년이 되는 나영이는 이곳저곳 전전하며 제일서점에서 일하며 삶을 힘들게 영위하고 있다. 나영이가 새로이 이주한 곳의 주인과 이웃 주민 모두 서울로 올라와 힘든 서울살이에 여념 없는 이들이다. 솔롱고와 마이클은 각각 몽골과 필리핀에서 서울로 돈을 벌기 위해 이주해 온 청년들이다. 각박한 서울살이 속 나영은 솔롱고와의 만남 속에서, 그리고 나영과 주인할매, 희정엄마는 서로의 삶에 위로를 건네며 위안을 얻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당차게 서울살이를 해나가며, 잊었던 꿈을 다시 꿀 것이라 말한다. 이것이 본 작품이 오프닝 넘버(opening number) ‘서울살이 몇 핸가요?’로 시작해서 이 넘버의 리프라이즈(reprise)로 클로징 넘버(closing number)가 구성되는 이유이다.
뮤지컬 <빨래>의 핵심 메시지는 ‘빨래’와 솔롱고의 넘버 ‘참 예뻐요’라 할 수 있다. 풍에 걸린 원수 같은 남편의 병시중에 이어 식물인간이 된 40대 딸 병간호까지 하고 있는 주인 할매는 “빨래를 한다는 건 내가 살아있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그는 매일 같이 딸의 천 기저귀를 손빨래하며, ‘빨래’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딸이 살아있고, 그런 딸을 자신이 살아있어서 돌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주인 할매에게서 그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였던 ‘빨래’는 주인 할매와 이웃으로 확장되면서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매개로 확장된다. 옥상에 널려 있는 빨래를 보며 주인 할매는 각 이웃들의 세상살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각자의 삶을 보여주던 빨래는 옥상이라는 공용 공간에 전시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새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노출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노출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유대감과 공동체감, 그리고 위로라는 긍정적인 기능과 맞닿아 있다. 마지막으로 ‘빨래’는 주인 할매와 희정엄마가 직장에서 좌천되고 서울살이에 지쳐 그저 흐느껴 우는 나영을 달래는 수단이 된다. 넘버 ‘슬플 땐 빨래를 해’의 가사 중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시간이 흘러 흘러 빨래가 마르는 것처럼 슬픈 네 눈물도 마를 거야”라는 말은 곧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된다. 우리의 삶을 담아온 빨래가 마르기 위해서는 바람이라는 조력자가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슬픈 삶도 누군가와 함께라면 그러기 전에, 괜찮았던 상태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말주변도 별로 없고,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 보였던 나영이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울기만 하는 장면, 그리고 그런 나영을 위로해 주며 그의 눈물을 닦아주는 주인 할매와 희정엄마. 그들의 모습 속에서 관객은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서러웠던 기억 혹은 지금 힘든 것들이 떠오르며 어느새 나영의 눈물에 전염된다. 누군가 나의 서러움과 힘듦을 알아주고, 위로해주길 원했던 과거의 시간 속 숨겨왔던 감정이 고개를 내밀고, 넘버 ‘슬픈 땐 빨래를 해’라는 장면이 전개되는 시간 동안 과거에 멈췄던 아픔은 다시 흐른다. 그들이 전하는 위로에 우리의 상처는 아물기 시작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 의해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나영의 에너지는, 불법 체류자로 사회에서 고립된 위치에 있는 솔롱고에게로 향하고, 동시에 솔롱고는 나영이를 웃게 만드는 존재가 된다. 나영을 처음 본 순간 반한 솔롱고는, 나영을 보며 그녀가 참 예쁘다는 말을 남은 넘버 ‘참 예뻐요’를 부른다. 그리고 이 넘버의 멜로디는 넘버 ‘아프고 눈물 나는 사람’으로 연결된다. 전자의 넘버에서 나영에 대한 솔롱고의 감정만이 이야기되었다면, 후자의 넘버에서는 나영과 솔롱고가 서울살이에서 겪은 각자의 아픔을 내보이며 서로를 위로하며 감정을 나눈다.
(솔롱고) 반말하고 욕하는 사람들 앞에, 주먹쥐고 일어서고 싶지만
고향 형제 때문에, 한국에 오느라 진 빚 때문에
참아요, 참다보면 사람들은 잊어요. 우리도 사람이란 사실 잊어요
(나영) 참았어요, 외로워도 달리 기댈 곳이 없기에
잊었어요. 참다보면 가끔 잊어요. 나도 사람이란 사실 잊었어요
반말하고 쉽게 욕하고 찝쩍대고, 쉽게 해고하는 사람들 앞에
큰 소리치고 욕하고 싶었지만, 이번달 방값 때문에
어딜 가도 마찬가지란 생각 때문에
참았어요, 참다보면 잊어요. 나도 꿈을 가진 여자란 걸
- 넘버 ‘아프고 눈물 나는 사람’ -
그리고 넘버 ‘슬픈 땐 빨래를 해’가 끝나고 나서, 솔롱고가 나영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순간 다시 넘버 ‘참 예뻐요’ 멜로디가 흐른다. 이 전개를 통해 ‘예쁘다’라는 말은 나영의 외모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며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나영의 꿋꿋한 내면의 모습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넘버 흐름의 끝에, 나영이 아픔을 극복하고, 솔롱고와 사랑에 빠지자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찾아온다.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개나리가 만개해 있고, 나영과 솔롱고를 비롯한 사람들은 새 출발을 시작한다.
지금의 시점으로 본다면 다소 촌스러운 미감, 베트남 여자와의 결혼, 성희롱 등 현재와 다소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더불어 우리 현재 우리 사회는, 이제 옥상 위에 빨래를 널기보다 세탁기에 꺼내서 집 안에서 내부건조를 하거나 건조기를 돌리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빨래’는 작품에서 다루는 ‘빨래’와 다른 감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손으로 빨아서 바람으로 빨래를 건조시키던 시절이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며 각자의 삶을 보다듬어주며 서로의 눈물을 말려주던 시기라면, 지금은 각자 가장 사적인 공간인 집 안에서 각자 해결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더불어 빨래가 자연의 바람이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기계에 의해 마르는 것처럼, 우리의 눈물도 또다른 자본에 의한 무언가에 의해 말라가게 되었다. 우연히 본 유튜버 드로우 앤드류의 한 영상의 제목인 ‘간섭은 많고 유대는 없는 한국사회’라는 말처럼 대부분의 것이 기계화된 사회 속, 우리는 가장 중요한 미덕은 잃어버리고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임금체불, 서울살이, 고달픈 삶, 카드값 등은 여전히 우리의 삶이며, 아픔이다. 더불어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타지에서 서울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지만, ‘서울살이’는 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서울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포함되는 말로서 서울 토박이도 예외가 아니다. 서울 중심, 서울 과열의 사회 속에서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 서울로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감정은 숨긴 채, 부당한 일은 눈감은 채 하루 하루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렇기에 뮤지컬 <빨래>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도, 다른 곳에서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여전히 우리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