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무대는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강렬한 붉은 천이 무대 중앙에 내려와 있고, 그 주변을 붉은색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붉은색 탓에, 공연장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공연이 시작된 후 붉은 천은 무대 위쪽으로 사라지고, 혼란의 시대가 펼쳐진다. 맨발의 소리꾼들은 지도층의 부패와 타락으로 혼란에 빠진 정세를 한탄한다.

 

그리고 그 혼란의 정국 속에서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등장한다.

 

 

[국립정동극장] 적벽_공연사진_9.jpg

 

 

판소리 뮤지컬 <적벽>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으로 불리는 ‘적벽대전’을 소재로 한다. 3세기 한나라말에, 위·한·오나라가 부패와 혼란의 정세 속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368년 발간된 소설 [삼국지연의],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불렸던 판소리 ‘적벽가’를 원전으로 한 작품이다.


무대 위 강렬했던 빨간 빛처럼, 뮤지컬 <적벽>은 내내 관객들에게 강렬함을 선사한다.

 

극을 관통하는 건 날카로운 카리스마다. 무대 위 소리꾼들은 부채만을 이용하여 여러 퍼포먼스, 역동적인 군무를 선사한다. 부채가 동시에 접히고 펼쳐질 때마다 화살을 쏘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다. 소리꾼들은 부채 이외에 특별한 소품이나 무대 장치를 활용하지 않지만, 어떠한 꾸밈 없는 그 ‘심플함’이 한데 모인 군무가 웅장함과 화려함을 만들어 낸다.

 

판소리라는 장르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판소리는 정적인 장르라는 인식이 강했고, 웅장하거나 화려한 장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판소리 뮤지컬 <적벽>은 그러한 편견을 보기 좋게 뒤집고,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며 판소리 장르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국립정동극장] 적벽_공연사진_6.jpg

 

 

소리꾼들의 의상 역시 날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긴 직선 종이들이 가로, 세로 모자이크로 배치 상의에서는 어떤 유순한 느낌도 받을 수 없다. 소리꾼들 모두가 맨발인 것도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모든 소리꾼들의 맨발이 어떠한 꾸밈이나 기교 없이, 오로지 날 것의 실력으로만 승부한다는 의지처럼 다가와 인상적이었다. 소리꾼들의 의상, 분장 그리고 맨발까지 그 모든 것에게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국립정동극장] 적벽_공연사진_1.jpg

 

 

그러나 <적벽>은 카리스마로 웅장함을 선사하고, 적벽대전 장면을 통해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도 민중들의 예술이었던 판소리답게, 지배층의 위선을 폭로하고 희화화하는 풍자도 가득 담겨 있다. 이러한 장면들은 적벽대전에 집중하며 고조됐던 관객의 긴장감을 다시금 풀어주고, 관객석 여기저기 피식하는 웃음이 새어 나오게 한다.

 

조조가 유비, 관우, 장비를 피해 도망치는 장면은 풍자적 면모가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조조가 말을 거꾸로 탄 채 도망치는 장면이나, 가까스로 도망에 성공한 조조와 그 부하들이 우악스럽게 싸우는 장면들이 그렇다. 날카롭고 강렬한 무대를 선사하면서도, 동시에 권력자, 악인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여러 유머로 관객들을 웃게 만든다.


무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막의 존재였다. 고전 판소리를 원전으로 하는 만큼, 알아듣기 어려운 한자어, 고어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자막을 참고하면서 어떤 의미인지 짐작하고, 한글로 풀어 쓰여 있어도 알지 못하는 표현들은 밑에 있는 영어 자막들을 읽으며 뜻을 추측할 수 있었다.

 

영어 자막의 존재 덕분인지, 관객석에는 종종 외국인 관객들도 눈에 띄었다. 고전 문학을 바탕으로, 판소리라는 한국의 전통 음악 장르에 기반해 있어 한국인이 아니라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공연임에도, 자막의 존재 덕분에 더욱 다양한 사람들이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 같아 좋았다.

 

심지어 영어 자막의 존재는 한국 문화에 익숙한 나에게도 내용을 파악하고 공연에 몰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국립정동극장] 적벽_공연사진_2.jpg

 

 

판소리 뮤지컬 <적벽>의 특징 중 하나는 젠더프리 캐스팅이다. 삼국지, 적벽대전은 전형적인 남성 인물들이 내용을 이끌어가는 남성 중심 서사다. 그러나 판소리 뮤지컬 <적벽>은 남성과 여성 배우 모두 역할에 캐스팅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서사에 균열을 가한다.

 

이는 판소리 뮤지컬 <적벽>의 현대성을 더하는 장치다. 동시에 무대 뒤편에서 연주되는 한국 전통 악기들은 판소리 음악의 전통성을 보여준다. 과거부터 굳게 이어져 온 우리의 전통음악과 현시대의 새로운 가치가 한데 어우러진 무대였다.


평일이었음에도 공연장은 관객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공연장을 나가는 길에는 관객들의 여러 호평이 들려왔다. 고전이 힘을 잃은 현실에서도, 판소리 뮤지컬 <적벽>은 여러 현대적 장치를 가미해 고전과 전통의 가르침과 가치를 전한다.

 

판소리 뮤지컬 <적벽>은 오는 20일까지 국립정동극장에서 공연된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