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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추하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보통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나 또한 보통의 사람으로서 아름답지 못한 것, 조금 더 나아가서는 보기에 혐오감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에 ‘추하다’라는 개념을 입힌다.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이런 ‘추함’의 개념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책 <추의 역사> 속에서 묘사하고 있다. 4장 괴물과 기이한 것들에서는 추로서 여겨지는 다양한 대상들 중 괴물과 기이한 현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불가사의 한 것들은 다가올 재앙의 전조로서 여겨졌다. 율리우스 오브 세퀜스의 기담집 속 사례 등 일련의 독특한 사건들이 공유되기 시작하며 사람들은 신비로운 혹은 기이한 존재에 집중한다. 그렇게 성경 <욥기>의 레비아단부터 3세기 <알렉산드로스 로망스>의 이야기들까지 실제 일어난 사건들 혹은 일어날 법한 사건들에 대한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해져 다양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속에는 그런 다양한 존재들에 대한 정리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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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것들의 책』 순서대로 외눈박이 인간, 스키아포드, 블레마이

 

 

괴물에 대한 관심과 정보의 확장은 측정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미학을 넓히며 암흑시대라는 유럽의 시대적 환경과 맞물려 더 발전되었다. 8세기 필사본인 <켈스의 서>에 나타난 화려한 매듭장식 속에 표현된 기이한 생명체의 모습을 통해 독실한 수사들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중세 그리스도교에서는 괴물을 진정한 구원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였다. 숨어있는 상징에 집중한 알레고리적 해석이 대두됨에 따라 괴물들이 신학적 메시지 전달을 위한 매개물로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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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스의 서』

 

 

매혹적인 존재와 경이로움에 대한 관심은 동시에 신비로운 이야기 즉, 미라빌리아에 대한 창작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모험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괴물이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작용한 것이 아닌 전설적이고 친밀한 존재로서도 여겨지며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을 정의하는 역할이나, '추'의 각인적인 특징으로 바탕으로 추상적인 개념을 기억하는 역할로도 사용된다.

 

점차 전설의 땅이라고 불렸던 곳에 대한 탐험이 시작되고, 생각과 다른 살제 생명체들의 모습에 회의주의적 시각이 등장하며 현대의 괴물은 좁혀진 범위의 의미로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괴물의 존재가 미지의 세계를 갈망하게 만들고 촉진적인 동기로서 사용되었다는 것, 여전히 상상력의 한 위치로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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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의 괴물 종족들』

 

 

괴물이라는 개념은 신비와 기이가 한 끗차이의 것임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두려움이, 혹은 동경이 괴물이라는 구체적인 존재로 드러나는 모습은 계속해서 모호한 감정과 생각을 구체화시키고자하는 인간적인 열망을 나타낸다.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과 궁금증은 이색적인 존재들을 만들어냈고 그 존재는 다시 미지의 세계를 해석하는 도구로서 사용되었다.

 

혐오의 시대라고 불리는 지금, 추함은 부정과 혐오의 집합체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결국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존재하게 하는 것은 추함이다. 더불어 ‘추’의 기준은 개인의 인식 안에서 형성되며 확장하자면 인간의 기준과 관점에서 해석된 결과이기도 하다. 추하다는 말은 어쩌면 인간세계에서만 성립가능한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규정 짓고자하는 인간의 이성적인 심리가 추와 미를 나누었지만 서로의 존재는 서로에게 필수 불가결하다. 뮤지컬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모두에게 추한 존재로서 여겨지는 꼽추 콰지모도가 가장 아름다운 여성 에스메랄다의 미와 합일되는 순간, 감상자는 절정의 감정을 느낀다.

 

마지막 넘버 <춤을 춰요. 에스메랄다> 속 죽은 에스메랄다를 안은 콰지모도의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듯한 양극의 존재가 결국 하나가 되며 반대의 개념이 화해하는 것, 융의 개념으로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만나 온전한 자아가 이루는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다.

 

미를 옹호하고 추를 배척하는 관점으로, 마찬가지로 세상의 요소들을 이분법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책을 이해할수록 나를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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