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지역에서 ‘근대’라고 불리는 시기를 들여다보면, 신의 영역을 배제하고 그 흐름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근대의 심연에 '신'이라는 존재가 깊숙이 내재하고 있기에, 설령 신과 동떨어져 보이는 과학을 이야기할 때도 신을 빼놓고 근대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겠으나 신의 존재가 근대의 시작과 끝에 모두 중요했지만, 그 방향, 즉 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이 점차 달라졌습니다.
‘신’이라는 미명하에 부패를 정당화했던 중세를 거치며 생겨난 종교와 신에 대한 의심은, 견고했던 신의 우월함을 깨뜨리고 비로소 신을 인간 곁으로 이끌고 왔습니다. 이러한 신에 관한 생각의 변화는 예술 작품에서도 드러납니다. 이번 글에서는 준엄했던 신의 세계에서 헤어 나온 인간이 신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 변화를 풀어가보고자 합니다.
몽테뉴를 통해 본, 신에게서 점차 벗어나는 죽음의 관념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Que sais-je?”
몽테뉴 Montaigne의 저명한 말 중 하나인 위의 문장을 통해 우리는 근대의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 과연 모두 옳고 진리라 할 수 있는가?' 몽테뉴의 질문은 기존의 생각을 뒤엎고 백지의 상태에서 다시 신을 정의했습니다. 신의 권위를 이용해 자신들의 횡포를 합리화했던 중세의 가톨릭 교회와 다르게, 신세계의 민족들을 “신들의 손에서 방금 튀어나온 인간들”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던 몽테뉴의 말은 필자의 가슴을 고동치게 합니다.
종교가 독차지한 우월성을 무너뜨리고, 덧없는 시간 속에서 누가 더 나을 것도 없으며 인간의 본성은 변치 않을 것이라는 몽테뉴의 외침은, 새로운 시각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종과 같았습니다. 이때 인간의 본성이란 사랑, 쾌락 등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나, 죽음 또한 인간이 본디부터 가진 성질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자연이 우리에게 떠나라고 강요한다. 들어왔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나가라며 말한다 ... 너희의 죽음은 우주 질서의 한 조각이다.”
죽음은 몽테뉴에게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친구, 아버지와 동생, 자식의 잇따른 죽음을 목격한 몽테뉴는 삶과 죽음과 관련한 성찰을 1580년에 발간된 자신의 저서 ≪에세≫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몽테뉴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이전의 죽음에 대한 개념과 대비됩니다.
Hans Memling, Last Judgment Triptych, 1467-71
한스 멤링의 작품 ≪최후의 심판≫을 자세히 보면, 가운데 위치한 천사의 저울 위에 올라간 인간은 천국을 가길 바란다는 듯이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고, 지옥행이 결정난 인간은 자지러지듯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너’와 ‘나’의 죽음의 결과가 다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서 사후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고, 이는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낯섦을 제거하자. 죽음에 익숙해지고 매 순간 죽음을 떠올려 온갖 모습으로 상상하자 ... 오만은 인간의 자연적 병이다. 이 광기를 잠재우기 위해 내가 택한, 그리고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된 방법은 자만심과 인간적 오만을 까부수고 발로 짓이겨 버리는 것, 그들에게 인간의 부질없음, 공허와 허무를 느끼게 하는 것, 그들의 수중에서 이성의 허약한 무기들을 박탈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몽테뉴는 ‘너’와 ‘나’의 죽음은 다르지 않고, 자연의 일부이며 죽음에 친숙해짐으로써 가지고 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자고 제안합니다. 몽테뉴에게 죽음은 천사의 심판이나 천국과 지옥과 같은 사후 세계, 종교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의 섭리였던 것이죠.
Philippe de Champaigne, vanitas, 1671
죽음을 매 순간 떠올리라는 몽테뉴의 말은, 죽음을 항상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를 떠올리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는 헛수고, 공허, 허위를 의미하는 라틴어 ‘vanitas’를 다룬 17세기 예술 작품과 연결됩니다. 바니타스를 다룬 17세기의 예술가들은, 공통적으로 화려한 세속적 물질 한가운데 해골을 그렸습니다. 사치를 좇는 인간에게, 현생의 세속적인 것들은 죽음 앞에서 무상하고 헛되기에 오만하지 말자는 바니타스는, 오만에 벗어나기 위해 공허함을 느끼라는 몽테뉴의 생각과 흡사합니다.
예수의 죽음 혹은 천국과 지옥과 같이 죽음을 종교와 직결하여 생각했던 근대 이전의 예술작품과 달리,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던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은 과연 현실 밖의 세계인가?", 기존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허물고 인간의 현재와 관련하여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갔다는 것에서 죽음을 통해 '나'라는 개념의 중요성이 움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죽음을 담은 작품을 통해 본, 죽음에 관한 감정 변화
Jacques Louis David, La Mort de Socrate, 1787
억울한 죽음 앞에 선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었지만 구태여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했었는데요.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18세기의 여러 작품을 작품의 대칭성이나 이야기의 소재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연구들이 있었지만, 필자는 대담한 소크라테스와 대비되는 지인들의 슬픔에 더 주목했습니다.
신성한 존재의 죽음, 사후의 세계, 죽음 앞에서 선 나약한 인간 등 죽음을 다룬 이전의 작품과는 달리 18세기에 나타난 죽음에 관한 감정 표현은, 죽음을 목격한 자들의 진실된 감정,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슬픔, 죽음과 인간 내면을 연결 지으려고 했던 태동을 암시합니다. 위의 작품은 등장한 인물 모두는 소크라테스의 사형 선고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하얀 천을 두르고 있고, 그의 죽음에 비통하여 울부짖는 사람들은 주황색, 파란색 등의 옷을 입고 있는데요.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고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소크라테스와 대비되어 색으로 강조된 슬픔은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내린 정부에 대항하는 것 같습니다. 거대한 권력이 바라던 대답을 하지 않은 죄로, 처참하게 처형했던 몽매한 시대에 항거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려내어, 종교와 신보다 그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모습을 통해 '나'에 대한 중요성이 움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범한 죽음, 인간이 겪는 모두의 장면
"어떤 초인을 찾던 천상의 환상적 현실 속에서 단지 그 자신의 반영만을 발견했던 인간은 그의 참된 현실을 찾고 또 찾아야만 할 곳에서 이제 더 이상 그 자신의 가상만을, 비인간만을 찾는 경향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가 위와 같은 문장으로 말한 바와 같이, 19세기는 종교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인간의 현실을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에 극단적으로 얽매이는 경향에서 벗어나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요. ‘참된 현실’이란 종교와 신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전한 우리의 현생이라 생각할 수 있으며, 종교로 모든 것을 판단했던 신의 늪에서 벗어나 현생에 집중하길 바라는 마르크스의 생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보는 그대로의 세계, 우리 눈앞에 놓인 세상을 주제로 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의했던 경향은, 19세기 사실주의 예술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Gustave courbet, a burial at ornans, 1850.
“천사를 본 적 없어 천사를 그릴 수 없다” 귀스타프 쿠르베는 종교화나 그리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그린 ≪오르낭에서의 장례식≫은 평범합니다. 평범하다는 것은, 삶을 지내면서 경험할 장례식의 모습이 어떤 과장이나 허구적인 묘사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귀하고 순결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 곁의 죽음을 담은 사실주의 예술 작품은 종교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마르크스의 생각과 연결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나'와 '우리'의 삶을 온전히 움텄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나'를 움트는 죽음의 물결 속에서
"서로의 차이와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는 자각을 통해서 다양성과 다원성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의 우리 시대를 탈현대의 조건으로 본 것이다."
17세기에서 19세기를 거치며, 인간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 기존의 신을 믿는 방식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신의 우월한 겉모습을 벗겨냈습니다. 신을 간곡히 믿었던 시대에는 죽음 후의 세계도 종교와 연관하여 생각했죠. 그러나 신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한 시대에는 죽음 앞에 우리가 좇는 허상의 물질들이 덧없음을 깨닫고,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보기를 바랐던 시대에는 담담하게 죽음을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신성한 존재의 죽음에서 존경하던 이의 억울한 죽음, 그리고 일상적인 죽음으로, 점차 작은 이야기에 주목한 죽음에 관한 예술의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 학자였던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정의한 탈현대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리오타르는 오늘의 우리 시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굉대한 이야기가 호소력을 상실하고, 획일적인 체계 속에 사람들을 통합시킬 수 있을 것이라던 헛된 환상이 깨진 시대라고.
종교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같은 생각과 답을 강요했던 중세의 시대가 끝나고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다시 말해 작은 이야기들 간의 공통된 면모와 다원성에 주목했던 근대의 모습은 우리의 삶을 진실로 바라보게끔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작은 것을 향한 시선의 변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를 움트는 죽음의 물결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