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 ‘ChatGPT’는 인간보다 꼼꼼하고 예리한 결과값을 출력하고, 때로는 고민을 들어주는 좋은 친구로도 변모한다. 50년 전 달에 착륙해 깃발을 꼽았던 인간은 이제 5년 안에 화성으로 사람을 보내고, 차후 화성을 식민지화하겠다는 담대한 계획까지 세운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어떻게 화성 정복을 꿈꾸는 단계까지 올 수 있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 지구? 생명체? 아니면 오직 ‘인간’? 인간에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준 시작에는 이번 뮤지컬의 주인공, 최초 우주탐사견 ‘라이카’가 있었다.
뮤지컬 <라이카>는 냉전시대, 소련의 스푸트니크2호를 타고 파견된 최초 우주탐사견 라이카의 실화에 주목한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의 ‘우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고, 그 결과 인간이 아닌 생명체를 우주로 먼저 보내는 동물 실험을 자행했다. 수많은 실험 끝에 지구 궤도 비행을 계획했고, 말을 잘 듣고 영리한 떠돌이개 라이카를 우주선에 태웠다. 그러나 당시 기술력으로는 우주선을 지구로 귀환시킬 장치를 개발할 수 없었고, 그렇게 라이카는 지구로 돌아오질 못한 운명을 떠안은 채 우주로 발사돼 우주로 나간 지 7시간 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공연은 라이카가 우주로 나간 뒤의 이야기를 새롭게 그린다. ‘만약 라이카가 우주에 살아있다면?’이라는 상상에서부터 뮤지컬 속 라이카의 여정이 시작된다. 뮤지컬 <라이카> 속 ‘라이카’는 스푸트니크2호를 타고 우주 어느 작은 행성, B612에 불시착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묘하게 친숙한 왕자를 비롯한 외계식물 장미, 바오밥들을 만나게 되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색다른 주제, 연출, 넘버
뮤지컬 <라이카>는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 <레드북>, <쇼맨: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 배우> 등의 창작진으로 유명한 한성적 작가, 이선영 작곡가, 박소영 연출이 만든 작품이다. 일명 ‘믿고 보는 한이박’ 세 창작진이 모여 만든 네 번째 작품으로, <여신님이 보고 계셔>와 <레드북>에 잇는 ‘인간 3부작’이라 표현할 수 있다. 특히 뮤지컬<라이카>는 ‘기다림’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작가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및 메시지를 담았다. 그러면서도 ‘우주’라는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며 새롭고 과감한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개, 외계인, 장미, 로봇이 말하는 ‘인간’과 ‘인간다움’
뮤지컬 <라이카>는 '인간'과 '인간다움'을 다루지만 인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주요 캐릭터 중 유일한 인간인 캐롤라인은 라이카의 회상 속에서 존재하며, 캐롤라인의 공간은 무대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많은 작품들이 인간의 잔혹함과 이기심을 다룰 때 인간과 인간의 갈등을 중점으로 다루는 것이 보통의 이야기 구조인 반면, <라이카>는 비인간의 관점으로 주제를 확장한다.
즉, 작품 속 '존재'라고 표현되는 비인간들이 무대 위를 채우며 인간은 객체화되고, 관객은 제3자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다움을 고찰할 수 있게 된다. <라이카>는 관객이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어려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 이로인해 인간 외의 생물체에 가해지는 폭력을 고민하고 탐색해 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연다.
뮤지컬 <라이카> 속 왕자와 장미의 상반된 성격 또한 작품의 주제 의식과 관련된다. 작중 가장 인간과 가까운 외형을 하고 있으나 '외계'인인 왕자는 누구보다도 인간을 혐오한다. 오히려 인간과 가장 거리가 먼 특징을 지닌 외계식물 '장미'가 인간의 서적을 가까이하며, 사르트르의 존재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등 이성적 면모를 뽐낸다. 이성적이고 생각하는 존재가 ‘인간’, ‘인간다움’이라면 장미가 그 누구보다 인간에 가깝다. 자신을 두고 또다시 떠나는 왕자를 위로하며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장미야말로 온전한 인간다움을 지닌다.
아쉬운 지점도 존재한다. 뮤지컬 <라이카>는 흥미롭고 시의성 있는 소재를 다루며 포부를 여나, 2막에 이르러 결말을 맞이하는 과정에서의 스토리 전개가 갑작스럽다. 특히 몇 년을 꿈꿔 온 왕자의 복수가 라이카로 인해 한순간에 철회된다는 지점이 그러하다. 이 외의 ‘인간다움’, ‘존재론’ ‘희생’ ‘책임’ 등의 묵직하고 복잡한 주제를 다루는 내용들이 후반으로 향할수록 응집성이 떨어진다. 끝으로 향할수록 깊이감과 밀도가 얕아지고, 뚜렷한 결말보다는 제작진의 주제에 대한 ‘고민 과정’을 보여주는 느낌이 강하다. 결말에 이르러 라이카가 내린 ‘기다림’이라는 선택은 결국 현상황에 대한 유지 및 보류에 가깝다.
배우의 실력과 매력이 빛나는 컨셉
뮤지컬 <라이카>의 매력 포인트를 뽑자면 단연 배우들의 소화력과 의외의 면모들이다. 동화적이고 과장된 의상 및 비주얼부터가 심상치 않다. 주제적으로는 심오하고 철학적인 내용을 건드리고 있으나, 이를 연출과 우화적 캐릭터, 배우들의 소화력으로 융화된다.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보다 사랑스러운 개, 자신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장미, 인공지능 로봇이라는 컨셉으로부터 출발해 뿜어져 나오는 배우들의 매력은 여타 뮤지컬에서 목격하지 못한 새로운 면모들이다. 자칫하면 '오글거림'을 유발할 수 있는 설정들을 배우들은 부담스럽지 않게, 자신만의 색깔을 입혀 소화해 캐릭터로서 존재한다.
질문과 고민이 만드는 변화의 시작점
현존하는 인간의 낙원은 수많은 개체의 희생 끝에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지금도 희생되는 동물들이 존재하고, 인간은 이에 따른 고민과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뮤지컬 <라이카>는 이와 같은 인간의 탐욕과 다툼, 이기심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희생과 책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인간이 자신을 이용했고,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라이카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다. 그러나 라이카는 ‘인간’과 다르다. 인간, 특히나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었던 캐롤라인을 보고 싶어 하고, 인간을 파괴하거나 단죄하거나 처벌하려고 하지 않고 반성할 시간을 기다려준다. 라이카에게 ‘기다려’를 가르친 건 인간이지만, 정작 인간을 기다려주는 존재는 ‘라이카’이다.
뮤지컬 <라이카>는 인간이 마주하기 불편한 진실을 마주 보게 한다. 인간으로서 고민해 봐야 할 지점들이지만, 회피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질문을 던져 관객을 능동적으로 고민하고 성찰하게 만든다. 뚜렷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없을지라도, 이성을 가진 ‘우리’는 끊임없이 더 좋은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