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쩝쩝거리던 교수님이 운을 떼고 강의실이 웅성댄다. 아무개는 소리를 고래고래 아무개는 고개를 쭈뼛쭈뼛 손을 흔든다. 갱지에 학번과 이름을 적고서로를 마주한다. 저놈은 어디서 태어났으며 뭘 먹고 자랐으며 나이는 나보다 많은지 적은지. 오늘 아침은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수업 전 변은 잘 보았는지 아닌지. 동태를 살피고 관상을 살핀다. 조별과제는 그렇게 시작된다.
말 한 번 잘못 꺼낸 아무개가 조장으로 선출되고 잽싼 아무개가 자료조사를 맡는다. 눈치게임에 실패한 아무개 둘이 제작과 발표를 맡고 채팅방을 판다. 톡, 톡, 톡 발신자는 있는데 수신자는 없는 채팅이 시작되고 조별과제는 그제야 시작된다.
조별과제의 효능은 가히 위대하다. 조별과제는 정치인의 권력욕도 삭제시킬 수 있으며, 사이비의 결속력도 해체시킬 수 있다. 달변가를 벙어리로 만드는 일도 가능하며 심지어는 싫다던 공산당이 좋아질지도 모른다. 그 덕에 전국 방방곡곡 피해자가 속출하고 고성방가가 오간다. 이쯤 되면 이건 사회문제인데 정부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어제 먹은 빠삐코의 부가세가 아깝다는 생각이 스칠 즈음, 조별과제는 일종의 인문학 과제라는 걸 깨닫게 된다.
서론이 길었던 만큼 나도 조별과제가 진절머리나게 싫다. 그런데 어쩌나 교수님은 조별과제가 재밌고 그의 판단에 나의 미래가 달려있다. 참된 제자는 스승의 뜻을 정진하는 법이고, 난관을 극복하는 방법론은 언제나 낙관인 법이다. 나의 이데아는 그렇게 시작됐다. 야매이기는 해도, 나의 이데아를 깨우친다면 평온할지 모른다.
네가 원하는 것을 아낌없이 주겠노라. 기꺼이 호구를 자청하겠으니 어서 쪽쪽 빨아먹거라.
읽씹을 하거나 말거나. 버스를 타거나 말거나. 복붙을 하거나 말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애당초 아무런 기대가 없다. 그러던지 말던지 천연기념물 대하듯 존재 자체에 의의를 둔다. 타인을 바꾸는 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라 복잡히 생각할수록 그냥 더 복잡해진다. 나는 그냥 나대로. 너는 그냥 너대로. 어차피 우리는 제각기, 생긴 대로, 꼴리는 대로 산다. 서로에 연민을 느끼는 편이 보다 가능성 있는 가정이다. 소크라테스도 실패한 게 갱생인데, 사칙연산에 그친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나. 이데아를 깨우치고 싶다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러던지 말던지 그냥 내비둬야 한다.
있는 힘껏 그들에 불행이 닥쳐오길 바래봤자다. 이런 류들의 특징이 또 순진무구하게 행복한 덕에, 내 몫은 지금보다 조금 더 꼬이고 엉키는 것뿐이다. 리벤지 욕구는 리벤지 영화나 쇼미더머니로 채우는 편이 보다 현실적이다. 우리에게 놓인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꼬일 것이냐 사유할 것이냐.
난관 속에서 낙관을 찾고. 낙관을 위한 이데아를 좇는 것은 삶의 기술이다. 이데아 없이 낙관을 좇고 난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대개 허무맹랑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이데아의 요는 난관 해결의 근거다. ‘적을 사랑하라, 연민을 느껴라’ 부터 ‘오히려 좋아’ 까지. 언뜻 듣기에 개소리 같은 명언과 격언이 신봉 받는 이유는 결국, 이데아를 좇기 위한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호구 취급을 받음에도 낙관적인 사람이 있다. 난관을 해결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 똑똑한 듯 비관적인 사람이 있다. 난관을 해결하지 못한 채 투덜만 늘어놓는다. 무엇이 그들을 나눴을까. 그들 중 꼬인 건 누구이고 사유한 건 누구일까. 이데아를 좇은 자와 쫓은 자는 누구일까. 그래서 그들 중 누가 영리할까. 행복할까.
조별과제를 빙자한 인문학 과제는 삶의 기술을 내포한다. 삶의 기술을 위해, 영리해지기 위해,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저마다의 이데아를 좇을 당위가 있다. 진퉁이건 야매건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