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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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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요람이자 무덤이다. 삶을 영위할 터전을 제공하는 기회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돌변해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바다를 정복할 수 없지만, 그래도 바다를 포기할 수는 없다. 패배가 예견된 파도와의 싸움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가족과 이웃을 이미 여럿 집어삼킨 바다에, 또다시 그물이란 무기를 쥐고 폭풍우와의 전쟁을 치르러 나갈 연극 <만선>의 곰치가 그렇다.


전라도 남해의 어느 작은 어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 연극 <만선>은 1964년 국립극장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천승세의 장막극이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뱃놈’ 곰치는 바다에 부서(보구치) 떼가 가득하단 소식에 배를 띄워 만선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배는 곰치의 것이 아닌 선주 임제순에게 빌린 것이다. 잡은 고기는 배를 대여한 값으로 전부 넘어가고도 2만 원이나 남는다. 임제순의 하수인 범쇠는 곰치 딸 슬슬이를 자신에게 팔면 2만 원을 대신 갚아준다며 가족을 농락한다. 빚을 갚아야 될 시간은 고작 3일이기에, 태풍이 몰아치는데도 곰치와 아들 도삼, 슬슬이의 연인 연철은 바다에 나갈 수밖에 없다. 바다란 괴물에 이미 아들 셋을 잡아먹힌 엄마 구포댁과 딸 슬슬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도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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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7월 당시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된 <만선>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2021년과 2023년 두 차례 공연 후 2025년 다시 돌아왔다. <만선>은 3월 6일부터 3월 30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돼 막바지를 앞두고 있다. 곰치 역에 김명수, 구포댁 역에 정경순, 도삼 황규환, 슬슬이 강윤민지, 연철 성근창, 임제순 역엔 김재건, 성삼 역엔 김종칠, 범쇠 역엔 박상종, 무당과 동네 아낙 역은 조주경, 또다른 동네 아낙 역엔 김경숙, 마을 어부는 정나진, 순경 외 다역엔 문성복이 출연한다.


가장이자 아버지, 구포댁의 남편이기도 한 곰치는 미련할 정도로 바다와 만선에 대한 집념이 강한 고전적인 남성상이다. 자식 세대이자 젊은 어부들(도삼과 연철)이 외국에선 요즘 기계로 바다 속을 보면서 고기를 잡는다며 푸념해도, 맨몸으로 부딪치는 전통적인 어로 방식을 고집한다. 이미 아들들 여럿을 잃은 후에도 아기마저 열 살만 되면 배를 타게 할 거라 선언하기도 한다. 만선을 이뤄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단 목적보다, 물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만선 그 자체에만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아집은 태어날 때부터 바다에서 살고, 바다에서 죽는 게 당연한 삶을 산 것에서 비롯됐다. ‘그물을 손에서 놓는 날에는 차라리 배를 가르고 말 것이여.’ 곰치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바다에 나가는 것밖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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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을 바다에 제물로 바치는 곰치와는 반대로, 아내 구포댁은 자식들에 대한 집착과 모성으로 평생을 버텨낸 강인한 여성이다. 바다에 눈이 뒤집힌 뱃놈의 아내, 자식 여럿을 먼저 보낸 한 많은 여자, 언제 죽어 돌아올지 모르는 어부 아들 도삼과 애지중지 키운 딸 슬슬이, 생때같은 아기까지 지켜야 하는 어머니이기도 하다.


구포댁은 곰치가 아기도 열 살만 되면 배를 태운다고 하자, 빈 배에 아기를 실어 뭍으로 보낸다. 살아서 무사히 뭍에 도착할지, 그런다 해도 어떻게 살지 알 순 없다. 그럼에도 바다에 잡아먹힌 자식들과 같은 운명을 맞게 할 순 없으니, 곰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아기를 배에 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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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은 이처럼 극단적인 부성과 모성,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자연과 한낱 인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시민과 천민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자본가, 극에선 구식 혹은 옛 것으로 그려지는 전통과 낯선 현대 문물. 곰치와 구포댁, 성삼, 임제순, 범쇠로 상징되는 구세대와 도삼과 연철, 슬슬이, 나아가 어린 아기로 상징되는 신세대. 무당의 주술과 구포댁의 기도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감이나 소망에 의지하는 행위, 반대로 외국의 신기술이라는 눈에 보이는 첨단 과학을 거부하는 행위 등 수많은 갈등 요소들로 채워진 작품이다.


요즘처럼 전통이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 혹은 추억 가득한 아날로그나 신선한 문화가 아닌 버려야 할 옛 것이었던 땐 전통과 현대적인 가치가 갈등하는 건 당연했다. 또한 천박한 자본주의의 출현으로 고통 받는 건 성실하게 살아온 소시민들이었다. 가진 게 없는 서민들은 자신들의 가치가 숫자 몇 개로 재단되는 걸 못 견뎠다. 혹은 평생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자연에 의지하며 격동의 시대를 버텼다.


전자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의 아버지 윌리 로먼, 후자는 펄 벅 <대지>의 아버지 왕룽을 연상시킨다. 천승세 <만선>의 아버지 곰치는 두 경우에 다 해당한다. <대지> 왕룽이 땅에 집착하는 것처럼 <만선> 곰치 또한 바다에 집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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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치와 구포댁만 남은 엔딩에서, 배의 갑판처럼 경사진 무대 위로 퍼붓는 비 또한 <만선>의 명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사용된 물의 양은 5톤이다. <만선> 연출가 심재찬은 ‘파도와 폭풍우가 이들의 인생 자체를 상징하기에 이 장면에선 꼭 물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극 초반에 곰치는 배 가득 부서 떼를 잡아와 만선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배를 빌린 몫으로 떼여 잡은 고기도 잃고, 극 후반엔 자식들까지 잃었다.


부부 둘만 남은 집 앞이 물로 잠기는 엔딩은, 불행이란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다. 모든 장면이 곰치 집 앞에서만 진행됐기에, 극에선 나오지 않은 바다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가족들이 떠난 텅 빈 집에 둘만 남은 곰치와 구포댁을 쏟아지는 비가 모질게도 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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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건 못 얻고 가진 것마저 다 잃었기에 <만선>은 비극이다. 그래도 이들의 몸부림이 의미 없는 행위는 아니다. 곰치와 구포댁의 딸, 2만 원에 팔려갈 뻔한 슬슬이는 원작과는 달리 수동적인 여성상에 머물지 않는다. 슬슬이는 원작처럼 범쇠에게 겁탈당하지 않고, 낫을 들어 자신과 가족을 농락한 범쇠를 겨눈다. 연인 연철과 오빠 도삼을 집어삼킨 바다, 벗어날 수 없는 어촌에서의 삶이란 운명의 굴레를 끊듯 목을 맨 것 또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저항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건 원작과 같지만, 캐릭터성이 바뀐 것이다.


2025년을 사는 관객에겐 1960년대 어촌 배경 극이 낯선 건 당연하다. 하지만 2020년대의 <만선>은 원작자에게 허락을 받아 캐릭터와 장면을 시대에 맞게 수정하고, 장면 순서를 달리 배치해 더욱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었다. 당시엔 리얼한 현실을 묘사한 사실주의 극이 이젠 고전이 됐을지라도, 시간과의 소통으로 동시대성을 확보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이에게 같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에도 <만선>을 봐야 하는 가장 확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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