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콘텐츠가 있으면 휴대폰을 보고, OTT를 켜고, 영화관에 가거나 연극을 관람하면 되는 시대. 이렇게 편리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다. 이런 폭넓은 선택지들의 속에서, 혹자는 묻는다.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웹소설을 읽으면 되는데, 왜 “종이책”을 읽는 거야?
사실 내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학교가 끝난 이후 여가 시간에 책을 읽는 건 당연한 취미 활동처럼 느껴졌다. 지금처럼 모두에게 휴대폰이 주어졌던 시기도 아니었고, 원할 때마다 언제든지 보고 싶은 드라마를 볼 수 있는 OTT 플랫폼이 존재하던 시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항상 책을 읽었다. 누구나 한 번쯤 읽었을 법한 ‘그리스 로마 신화’ 나 'WHY' 만화책 시리즈부터, ‘제로니모의 모험’ ‘13층 나무집’ ‘윔피키드’... 와 같은 어린 시절의 특권처럼 느껴지는 책들, 그리고 영원한 베스트셀러, 해리포터 시리즈와 트와일라잇, 메이즈러너와 같은 영 어덜트 시리즈까지. 그때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를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지금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휴대폰으로, 태블릿으로 원하는 매체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마 어린아이들은 옛날의 나처럼 책을 열심히 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종이책이 남아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고, 교보문고와 알라딘 등 대형 서점을 찾아 소설책을 뒤적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살아서 움직이는 생생함을 가진 온갖 문화생활들을 두고, 아직까지 납작한 종이로 이루어진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오히려, ‘납작한 종이’로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볼 때, 무언가를 더 ‘상상’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감독과 작가가 이미 배우를 그들이 생각하는 캐릭터에 맞게 캐스팅 해 놓은 상태고, 공간적인 것이나 소품 등의 배경적인 모습 또한 이미 모두 연출해 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에 굳이 의문을 느끼거나 다르게 생각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타인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요소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책을 읽을 때는 다르다. 책 속의 주인공은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작가의 묘사만을 읽고,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아야 한다. 책의 페이지가 한 페이지씩 넘어갈수록 이야기는 전개되고, 인물들은 움직인다. 모든 게 이미 다 차려져 있는 영상 매체와는 다르게, 책 속의 모든 것들은 작가가 정해 놓은 스토리라인과-우리의 머릿속 상상력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이는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가 된다. 영상 매체와 다르게 내가 원하는 대로 인물을 그리고 소품을 배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상력’을 더 넓게 펼칠 수 있다는 게, 종이책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유일까?
그럴 거라면 전자책을 찾았으면 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좀 더 감성적인 이유를 들고자 한다. 바로, 책을 펼치고 넘기기 위해 아직까지 종이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펼치면, 신간이 아니고서야 그전에 책을 읽었던 사람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읽은 곳을 표시하려 했는지 접힌 흔적이 있는 페이지, 너무 많이 읽어 너덜너덜해진 페이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짝 찢어진 페이지... 종이책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거쳐 간 사람들의 흔적을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우리는 싫어하진 않는다. 나와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꺼워한다면 모를까. 개개인에게 맞춰진 전자책과는 다른 매력이다.
이래도 종이책을 읽는 이유를 아직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나만의 이유를 들고 싶다. 눈이 덜 피로하다. 눈뿐만이 아니라, 머리가 아프거나 쉽게 피로해지지도 않는다. 전자책을 보다 보면 눈이 피로해져 시력이 안 좋아지는 느낌이 있기 마련인데, 종이책은 그렇지 않다. 아무래도, 이런 사소한 이유 하나하나가 모여, 이 시대에 종이책이 남아 있는 이유가 되는 게 아닐까. 미디어에 질렸다면 종이책으로 도피해 보는 걸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