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최초의 우주개 라이카. 그가, 아니 그녀가 복귀장치도 없이 쏘아 보내진 저 먼 우주에서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어떨까? 이 흥미로운 상상에서 시작하는 뮤지컬 <라이카>에는 우주개 라이카, 어른이 된 어린 왕자, 아름다운 장미와 로켓으로 만들어진 로봇 로케보트가 등장한다. 이렇듯 회상으로 등장하는 캐롤라인을 제외하면 <라이카>에 등장하는 주연은 모두 인간 외의 존재들이다. 비인간의 시선으로 '인간다움', 혹은 '존재다움'에 대해 질문하기 위함이다.

 

무대 위에 올라선 인간 배우들은 그 전위적인 외형 덕에 자연스레 관객의 눈에 비인간으로 비치게 된다. 생택쥐페리의 책 표지에서 따온 듯한 어린 왕자의 옷은 그나마 평범한 편. 갈색 토시와 갈색 부츠를 신은 라이카와 은색으로 부풀어진 바지를 입은 로케보트는 각각 개와 로봇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장미.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의상이다. 쭉 뻗은 배우의 실루엣과 잘 어울리는 빨간색 겉감과 초록색 안감, 머리 위의 장미잎까지. 이러한 외형은 말하지 않아도 그가 어린 왕자의 '장미'임을 알아차리게 해준다. 하지만 화려한 외양보다도 더 중요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정의한 방식이다. 어린 왕자가 소중히 들고 다니던 구멍 뚫린 상자 자체보다도 그 상자 속의 양이 더 중요했던 것처럼.

 

  

뮤지컬_라이카_메인포스터.jpg

 

 

 

스스로 선택한 나의 존재: '아름다워'


 

1막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넘버를 꼽자면 장미 역의 서동진 배우와 바오밥들이 부른 넘버 '아름다워'다. 새침하게 무대를 누비는 길쭉한 장미가 동그랗게 순진한 라이카에게 불러주는 노래. 인간들에 의해 우주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인간들에게 버려졌던 라이카에게 장미는 어린 왕자에게 버려졌던 지난날의 자신을 투영한다. 그러고는 자신이 깨달은 무언가를 전달하려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선택하는 거라고"

 

 

나는 아름답다. 고로 존재한다.

 

사르트르라는 인간은 존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존재한다는 건 자신이 자신을 선택하는 거라고"

 

타인은 지옥. 존재는 혼자. 

나는 오직 나를 위해 아름다워.

이것이 바로 나만의 향기.

내가 택한 나의 본질. 

아름다워.

 

- 뮤지컬 '라이카' 넘버, <아름다워>

 

 

어린 왕자와 장미와 바오밥들이 있는 행성, B612의 존재들에게 인간과 존재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인간 같다는 것은 욕이다. 반대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더 많이 알게 된다는 것. 앎은 처음에는 오히려 존재를 불행하게 하지만 결국에는 선택지를 준다는 점에서 기쁨을 가져온다. 라이카가 자신이 타고 온 우주선에 귀환 장치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처음에는 고통스러웠지만 끝내는 본인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인물들은 그렇게 '나만의 향기', 자신의 존재를 정의한다. 아마도 극 중 가장 먼저 본인의 존재를 정의했을 장미는 아름다움을, 눈물에 뿌리내려 아름다움을 취한 나를 선택했다. 그는 때때로 라이카를 위로하고 배려한 뒤에 말한다. "이건 나를 위한 거야.' 내가 선택한 나의 존재를 위한 배려. 뒤늦게 모든 진실을 알게 되어 인간에 대한 복수심에 휩싸였던 라이카도 시간이 지나 자신의 존재를 정의한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나라는 존재. 라이카는 복수를 선택하는 대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한다.

 

라이카와 장미가 각자 정의한 자신의 존재는 반대되는 듯하지만 결국 같은 결과로 이어진다. 본인에 대한 책임, 혹은 본인에 대한 배려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발현된다는 것. 뮤지컬 <라이카>는 여기서 '어린 왕자'를 읽은 독자들에게는 낯익을 '길들임'이라는 단어를 꺼내 든다.

 

 

[꾸미기][크기변환][꾸미기]라이카강아지.jpg

 

 


길들인다는 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길들인다는 게 뭐지?"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너무 잘 잊혀지고 있는 거지.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여우가 말했다.


"관계를 맺는다고?"


"그래."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은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너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난 너에겐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 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인간에게 길들인다는 것은 상호작용이 아니다. 야생동물을 길들여 원하는 고기와 우유를 얻어냈던 인류의 역사처럼 그저 일방적인 관계 맺음이다. 라이카를 길들이고 우주로 보내버렸던 캐롤라인이나 장미를 길들이고 행성을 떠나버렸던 어린 왕자처럼 말이다. 어린 왕자는 극에 존재하는 누구보다 인간을 증오하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 같은' 인물이다. '가시 같은 진실을 알게 되어도 아프지 않도록', 라이카를 길들였고 그래서 결국 자신과 함께 라이카가 지구를 멸망시키기를 원했다. 본인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닌 관계에 대한 상대의 일방적인 책임만을 요구한다.

 

극 중 등장하는 두 개의 상자는 묘하게 비슷하다. 어린 왕자의 양을 담은 구멍 뚫린 상자와 라이카가 담겨 있던 상자. 실제 강아지를 쓸 수 없기에 상자로 라이카의 강아지 시절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결국 어린 왕자의 상자에도 라이카가 담긴다. 라이카를 상자 안에 넣었던 두 주체, 캐롤라인과 어린 왕자는 라이카를 길들이려 했던 걸까. 이들은 라이카를 자신의 동반자로 삼고 싶어 하지만 일방적 길들임에 그친다. 왕자는 심지어 그 길들임에도 실패한 것 같지만.

 

길들임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잊히고 있는 진짜 길들임의 정의는 관계를 맺는 것이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듯, 그리고 <라이카>에서 이들이 노래했듯 길들인다는 것은 우주에서 서로에게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것. 꽤나 낭만적이지 않나. 이는 인간에게는 끝내 잊힌 길들임의 정의이자 인간이 아닌 라이카가 선택한 길들임의 방식이다. 따라서 라이카가 결말부에 외친 "이제부터는 내가 널 관리할 거야. 끝내주게 잘해주겠다는 거지!"라는 말은 가장 윤리적인 선언이다.

 


[꾸미기][크기변환][꾸미기]라이카 무대.jpg


 

 

인간에게 끝내 관용을 베푸는 결말


 

결말부. 뮤지컬은 충격적인 1막의 마무리와는 달리 2막의 마지막에서 겉으로는 행복한 끝을 맺는다. 이 모든 게 캐롤라인의 꿈이라면 그거야말로 정말 비극이겠지만. 누구를 위한 희극인가라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다. 동물과 인간이 나오면 으레 드는 '인간이 미안해'라는 생각이 떠오른 지 오래였으니 정말로 라이카가 지구를 폭파해도 할 말은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라이카는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고 인간들을 반성시킬 방법을 찾는다며 시간을 달라고 한다. 인간과 같아지고 싶지 않아서. 인간들이 반성했으면 좋겠어서. 다른 강아지들이 희생당하는 것이 싫어서. 이유는 많지만 라이카는 결국 돌아온다. 라이카는 왜 지구를 폭파하지 않고 돌아온 걸까. 죽어버린 '라이카'를 기리는 동상 앞에서 낑낑대는 라이카를 무시하고 그저 "엄마가 저런 개 만지지 말랬지!"라며 가버리는 인간들에게 대체 무슨 희망을 본 것인지.

 

말로는 용서했다고 하지 않지만 끝내 용서와 다를 바 없는 그 무언가를 받으며 찜찜함 없이 관객들이 집에 갈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배려였을까. 심지어 우주로 보내진 동물들에 대한 사후 처리까지 해주고 있으니, 동물들이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그 죄책감마저 덜어준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 라는 오만한 노래를 서슴없이 부를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 우리에 라이카는 결코 포함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 모든 비인간인 라이카, 장미, 어린왕자, 그리고 로케보트는 인간들의 인간다움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거울이 된다. 이 오만한 노래에 대한 답이, "구원할게." 라는 것이라면 아마 이 결말은 라이카보다도 인간에게 더 치유되는 결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라이카가 '인간 같지' 않은 선택을 했기 때문일 터다.

 

 

[꾸미기][크기변환][꾸미기]라이카캐스팅.jpg


 

그래, 라이카는 끝내 지구를 멸망시키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B612 어딘가 살아있을 라이카는 다른 강아지들을 길들일 것이고, 관리할 것이며, 끝내주게 잘해주겠지. 그것은 '인간 같지' 않은 라이카가 선택한 존재의 방식이다. 존재란 선택이고, 라이카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뿐.

 

 

윤희수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여러 질문들에 답을 찾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