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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키 17>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인간 역사의 유구한 선망의 대상이자 경계의 대상이다. 노화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고, 영생이란 그 섭리를 거스르는 일. 아아,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먼 옛날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아 헤매다 결국 수은중독으로 사망했고 현대인류의 평균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 복제인간으로 수명을 연장하는 영화가 여럿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아마도 극장에서 처음 접했던 복제인간 영화, 'The Island'
<미키 17>의 복제인간, 미키 2 ~ 미키 18은 원형인 미키 반스의 기억을 연속적으로 계승한다. 이들은 '익스펜더블'이라고 불리며 지구를 떠나 니플헤임이라는 새로운 정착지로 향하는 우주탐사선의 위험한 일을 도맡는다. 그 과정에서 설령 죽더라도 그 전 미키의 기억을 다운로드해 다시 복사해 내면 그만이기 때문에. 따라서 이 '미키'들은 특정인 혹은 원본이라는 다른 존재를 위해 복사되는 것은 아니다. 따지자면 본인의 환생을 위해, 혹은 인류를 위해 복사되는 것이지. 영생을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것이 아닌 영생을 경험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여타 복제인간들과 차별점을 갖는다. 그러니 영화는 복제인간 담론이라기보다는 죽음이 거세된 존재가 갖는 가치에 대한 담론에 가깝다.
존재를 소비재로 격하시키는, 무한한 죽음
"죽는 건 어떤 느낌이야?"
10번째, 15번째 죽음을 겪고 다시 태어난 미키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그를 조롱하려는 사람도, 자칭 친구라는 티모도,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카이도 어김없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죽음이라는 것이 비극이 아닌 마치 놀라운 경험이라도 된다는 듯. 미키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하다가 마침내 카이의 질문에 답한다. 죽음이라는 건 몇 번을 겪어도 정말 아프고 힘든 일이라고. 일반적인 인간에게 죽음은 필연적으로 생의 마지막에 단 한 번 찾아온다. 살아서는 알 수 없는 유일무이한 것, 죽음. 필멸자들이 그 본질을 알고자 희구하는 것은 당연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감각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게 좋은 일일까? 죽음이 더 이상 존재의 소멸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건 죽음의 무게를 가볍게도 만들지만 결국 생의 무게도 가볍게 만든다. 이는 '익스펜더블'이라는 그의 직업 혹은 존재에서도 드러난다. Expendible, '소비되는'이라고 번역되는 형용사. 인간 삶이 유한하기에 의미를 갖는다면, 죽음이 무한한 익스펜더블에게 일회성 생은 그저 소비되는 소모품일 뿐이다. 죽음이 더 이상 무서운 것이 아닐 때, 존재는 한 단계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퇴보한다. 유일무이한 어떤 것에서 재생산할 수 있는 소비재로.
<미키 17>의 원작인 <미키 7>보다 영화 <미키 17>의 주인공이 무려 10번의 죽음을 더 경험한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릿수가 달라질 만큼의 더 많은 죽음을 겪은 탓에 주위는 물론 스스로까지도 소비되는 본인의 생을 받아들이는 미키. "Have nice day" 같은 안부 인사처럼 "Have a nice death."를 건네는 자칭 친구, 티모의 말에 억지로라도 웃음을 지으며 화답하는 미키의 모습이 처연하다.
소스와 인공육 사이 어디쯤, 미키의 맛
로버트 패틴슨의 체념한 듯한, 담담한 내레이션은 극악한 환경을 그냥저냥 유쾌한 듯한 분위기로 바꿔버린다. 그와 함께 나오는 Bon Apetit, '맛있게 드세요'라는 클래식한 메인 테마는 영화의 모순을 극대화한다. 사실 테마의 제목부터가 모순의 시작이다. <설국열차>의 '바퀴벌레 양갱'보다야 나아 보이지만 결코 맛있어 보이지는 않는 이 식단을 즐기라니. '진짜' 인간인 카이에게는 좋은 고기를, '가짜' 인간인 미키에게는 성장 촉진제가 들어간 인공육을 주며 맛있게 먹으라고 했던 일파 마샬이 생각난다.
일파 마샬은 미키 17과 미키 18을 소스를 구해오라고 풀어줄 정도로 소스에 집착한다. 이들 부부가 복제되지 않은 순수한 인류에 집착하듯. 이 태도는 언뜻 모순적이다. 소스는 인공육도 먹을만하게 만들어주는, 순수함을 가리는 가공된 식품이다. 하지만 순수 인간은 가공되지 않은 원고기에 가깝다. 미뢰의 정점이라며 소스를 숭상하는 일파가 인간에게만은 이런 순수함을 고집한다는 것이 의문스럽다.
소스는 인공육과 반대의 목적을 갖는다. 인공육이 원본 고기를 대체하려는 거짓이라면, 소스는 가공되었지만 요리의 주재료가 되는 고기를 돕는 보조재의 역할을 한다. 대체가 가능하지만 주제를 넘지는 않는 어떤 것, '익스펜더블'. 복제된 미키들은 물리적으로는 원본 미키를, 즉 고기를 대체하기 위한 인공육이다. 하지만 이 인공육은 인류를 위해 무한한 재생산이 가능한 소비재기에 일파 마샬에게 미키는 대체품도 아닌 소스로 기능한다. 원재료에서 이미 변형된, 한바탕 부서지고 으깨지고 다시 합쳐져서 탄생한 가공품. 찬란한 인간 문명 발달의 증거이자 산물이지만 인류를 위해 사용되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그런 곁들임. 그렇기에 미키 17이 흘린 피는 그녀의 비싼 카펫보다도 무가치하다. 최소한, 카펫은 이 먼 우주에서는 다시 구할 수 없지만 미키 17은 미키 18이 있기 때문이다.
미키 17은 이런 취급에 별다른 불만을 품지 않는다. 소스 취급을 하든, 인공육 취급을 하든 먹으라면 먹고 죽으라면 죽는다. 하지만 미키 18은 다르다.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이들을 참지 않고 급기야 총을 들고 상대의 존재를 말살하러 간다. 미키 18 대신 미키 17을 죽이려 한 'Classic Timo'의 설명은 옳을 지도 모르겠다. 순한 녀석이 오히려 다루기 쉽다는 말. 미키 18은 본인이 '소스'도 '인공육'도 아닌 '고기'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 같은 그의 행동은 일파를 몹시도 불편하게 한다. 소스로 격하된 존재가 권리를 주장하다니? 시스템이, 그러니까 인간이 원하는 대로 배합되어 원본의 맛을 끌어올려 주어야 할 소스가 제 기능을 벗어나려 한다면 남은 것은 폐기 처리뿐이다.
MICKEY 17과 MICKEY BARNES
인간 본연의 가치를 상실한 채 끝없이 이어지는 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미키의 이름이다. 이름 뒤에 숫자를 붙이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학창 시절, 흔한 이 름같은 경우에는 뒤에 숫자를 붙이지 않았나. 수진 1이나 수진 2이라던가 재영 1, 재영 2 같이. 하지만 실제로 친구끼리 이름을 부를 때는 숫자보다는 특성을 살려 부르곤 했다. 너는 큰 서영, 저쪽은 작은 서영같이.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사람을 기능적으로 분류하는 것 같다는 감각이 어린 시절에도 존재했었나 보다.
이에 반해 탐사대는 방송에서 미키의 뒤에 숫자를 붙여 고함친다. 익스펜더블이라는 그의 존재를 모두에게 알리려는 듯 말이다. 이미 미키는 그 탐사대 내에서 기능적인 존재일 뿐이었으니. 미키가 아니라 미키 4 정도 되기 때문에 그의 배식량은 반으로 줄어도 된다. 미키가 아니라 미키 6이니까 크레바스에 떨어져도 굳이 구조할 필요는 없다.
<미키 17>라는 제목은 영화가 시작된 지 꽤 시간이 지나서야 숫자판을 하나씩 넘기며 등장한다. 관객이 '17'이라는 숫자를 이해한 뒤에야, 사람의 이름 뒤에 숫자를 붙이는 데에 정당성을 부여한 뒤에야 영화는 그 제목을 드러내 보인다. 그의 이름 뒤 숫자는 미키의 생이 유일무이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디쉬가 아닌 소스 1, 소스 2 정도의 가치.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나샤에게 미키는 그 자체로 완결된 요리다. 이쪽은 순한 맛 미키, 저쪽은 매운 맛 미키.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 속에서 그 가치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 풍화되지만, 나샤에게만은 아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꼽자면 단연 죽어가는 미키를 끌어안고 있는 나샤의 모습이다. 언뜻 피에타 같기도 한 이 모습은 바깥의 무감하고 시끄러운 사람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누군가는 이 죽음을 그저 다음 미키의 시작으로 여기고 흘려보내는 대신 진심을 다해 슬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만이 미키에게 죽음이란 어떠한지 물어보지 않았던 것은 이미 그녀가 미키의 죽음마다 그 통렬한 슬픔을 함께 느꼈기 때문이리라.
더 이상 그 슬픈 죽음이 대체되지 않을 때, 리필이 비로소 끝났을 때 제목은 바뀐다. 'MICKEY 17'도 'MICKEY 18'도 아닌 온전한 하나의 개체, 'MICKEY BARNES'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