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James’s Park 전경 (직접 촬영)
G: 잔디에 앉아있는 사람들 행복해 보인다
나: 저 사람들도 집가서 취업 걱정할수도 있으니까 기죽지 말자
G: 진형이는 가끔 이런 식으로 T 모먼트가 나온다니까
지난 토요일 런던의 St. James’s Park에서 석사 과정 동기였던 언니 G와 산책을 하며 나누었던 대화다. 그 날의 런던은 참으로 기묘하면서도 런던다웠다.
월말에 시작되는 써머타임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화창한 영상 17도의 맑은 날씨,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햇빛을 쬘 수 없을 것 마냥 공원으로 몰려든 사람들,
모금을 위해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을 입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피리를 부는 거리의 남성,
‘Free Palestine’을 외치며 팔레스타인 국기를 등에 두르고 빅벤을 오른 남성¹,
그 남성 때문에 통제된 길거리,
수많은 행인들에게 반나절동안 이 사정을 설명하다 지친 나머지 ‘Someone is climbing up’이라는 말부터 뱉는 경찰
이 모든 것이 제각각이면서도 런던이었다.
석사를 마치고 도전했던 첫 취준을 장렬히 실패하고, 어차피 공백기를 보내게 된다면 한국 백수보다는 영국 백수라는 타이틀이 그나마 있어 보일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무작정 편도 티켓을 끊어 런던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어쩌면 ‘돌아왔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소속도, 정답도 없는 환경에서 모든 것을 내 판단으로 결정해야 하는 나날을 보내던 중, 우연히 스포티파이의 데일리 믹스에 있던 비비(BIBI)의 ‘홍대 R&B’가 내 귀에 흘러들어왔다.
방황하는 이들을 위한 사랑의 노래 홍대 R&B
홍대 R&B 뮤직비디오 中
돈 한 푼 없이도 헤맬 수 있는 홍대 거리
나는 저들과 다르다 믿는 이들의 어림
겨울바람에 내놓은 여인의 가는 다리에
미숙한 영혼을 끌어모으는 낡은 손짓
(중략)
싸구려 클럽 위스키
한 잔에 만원 넘는 바가지
악기 들쳐매고 계집애들 사이 낀 반반한 인디밴드 기타리스트
관광객들의 환상
희망적인 생각
빠르게 달리다 넘어진 스케이터 보이
그 옆에 술 취한 여친
모가지 뻣뻣한 언더 래퍼 양아치
어린 여자 꼬실 때나 오는 유명 인사 오빠
타투와 피어싱 음악과 술
담배 연기 쩌든 달셋방을
떠나지 못해 박지도 못하는 게 다들 참 비슷해
(홍대 R&B 가사 중 일부 발췌)
‘홍대 R&B’는 2023년 8월 비비가 발매한 앨범 ‘홍대 R&B’의 타이틀곡이다. 앨범은 17살 홍대를 동경하며 뮤지션의 꿈을 키웠던 비비가 20대 후반이 되어 카더가든과 술을 마시며 문득 지난 날 사랑했던 장소가 빚 좋은 개살구였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바라보며 키워 온 꿈과 노력은 남아있기에 사랑과 동경을 멈출 수 없다는 메시지를 타이틀곡 ‘홍대 R&B’와 수록곡 ‘한강공원’으로 전달한다. ‘한강공원’은 정해져 있는 기다림 끝의 행복을 전제하며 세상의 아름다운 면을 조명하는 노래인 반면, ‘홍대 R&B’는 아름답지 않은, 어쩌면 불편한 진실인 것들도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을 직시하지만 그것에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²
비비의 앨범 소개대로, 인생은 ’한강공원’과 ‘홍대 R&B’의 연속에서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런던은 홍대와 달리 돈 몇 푼은 있어야 거닐 수 있으며 분위기가 퇴폐적이지도 않지만 이곳에도 ‘떠나지 못해 박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신분으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한강공원’처럼, 긍정적인 삶의 태도로 런던을 즐기면서도 ‘홍대 R&B’가 비추는 저마다의 개살구같은 이면을 지니며 살아간다. 저마다의 성취와 방황을 오가며 기약없는 미래보다는 하찮은 것일지라도 현실의 과정에서 의미를 찾고 각자의 사랑을 한다. 어쩌면 동경, 열정, 희망이 담긴 이런 사랑은 홍대와 런던만의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각자의 사정’으로 끊임없이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난 해 우연히 런던 서부 중심가의 한 갤러리에서 영국의 문화예술계에서 오랜 기간 일해오신 한국 분과 짧은 시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곧바로 귀국하여 한국 정착을 준비할 지, 영국에서의 생활을 도전해볼 지 고민 중이던 나에게 그 분께서 해주신 말이 있다.
“여기서 지내는 분들 각자의 excuse(사정)가 있겠죠. 파트너 때문일수도 있고, 본인 판단 하에 영국 생활이 더 잘 맞다고 생각할수도 있고. 중요한 건 바로 한국에 가든 영국에 잠깐 더 있든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돌이켜보면 이 한마디로 영국에서의 모든 살림을 버리고도 다시 돌아온 게 아닌가 싶다. 2023년 처음 가졌던 런던에 대한 환상은 옅어졌지만, 이곳은 여전히 소속이 없는 지금의 내가 잠시 들를 수 있는 제법 괜찮은 마음의 고향이다. 그 분이 사용하신 ‘excuse’라는 표현을 의역하면 ‘각자의 사정’이 가장 가까운 의미일 것 같다. 외국인 신분이기에 겪는 불안정성에 지쳐가면서도, 사회적 틀에 갇히지 않는 이방인의 자유로움 사이에서 생겨난 런던에 대한 애증이 비비의 노래 속 홍대를 누비는 인간 군상처럼 떠나지는 않지만 정착도 못하는 각자의 사정을 만드는 것 같다.
업계 선배들이 도망치라고 외쳐도 열정으로 이어가는 커리어, 주변 사람들은 시큰둥해하지만 내 눈에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연인, 지난날의 추억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도시. 우리는 모두 각자의 홍대, 각자의 런던이 있다. 방황하는 와중에도 무엇인가를 열렬히 사랑한다면, 사랑했던 내가 남기에, 오늘도 런던에서 사랑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홍대 R&B와 한강공원 사이 어딘가에 있을 각자의 사정에서 끊임없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¹ 이 남성은 16시간 동안 빅벤 외벽을 올라탔다.
² 2023년 11월 에스콰이어 코리아와 비비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홍대 R&B' 앨범의 세계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