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스스로가 막 불쌍하고 그래?”
3년 전, 온갖 일이 잘못되어 펑펑 울 때 들었던 한마디가 지금껏 나를 괴롭힌다. 왜 나만 남들과 다른 경사의 길을 걷는 것 같았을까. 자기연민과 자학으로 똘똘 뭉친 나 자신을 위해 영화 한 편을 선물하기로 하고 극장으로 향했다. "인생 한 번뿐인 연기"라는 문장에 홀려 보게 된 영화는 모순덩어리 그 자체였다. 바랜 파란빛 집의 272kg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꾸준히 생명과 사랑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상한 힘을 가진 영화였다. 끝없는 우울을 체험하도록 하며 동시에 구원을 믿도록 독려했다. 지독한 외로움에 대해 논하면서도 사람과 사랑의 힘을 믿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동성 애인을 사랑하게 되어 가족까지 버리고 낭만을 좇았는데 그는 이제 자신의 거실에 고립되었다. 영문학 교수이지만 비대면으로 수업하고 카메라는 꺼둔다. 일어설 수조차 없는 그가 거동할 수 있도록 돕는 주치의 리즈만이 가끔 함께 등장한다. 영화 중반까지 그가 영문학을 가르치는 모습은 닿을 수 없는 이상을 향한 날갯짓에 불과하다. 끝없는 자학의 시간 속에서 호흡하고 있는데, 긁히고 찢겨 이미 너덜너덜한 인생인데 그리스 신화고 르네상스 문학이고 대체 무슨 소용인가. 누군가의 세계가 담긴 책 한 권과 독후감 몇 장이 회색 상자 속 그에게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영화 후반, 찰리가 ‘폭식’이라는 칼로 자신을 난도질하는 모습은 그 어떤 장면보다 잔인하고 처절하다. 문학에 관해 이야기할 때 눈을 빛내며 미소 짓던 그가 냉혹한 표정을 하고 온갖 음식들로 자신을 폭행한다. 자기연민이 불러일으킨 자기혐오와 스스로를 벌하는 순간들이 영화에 녹아있다. 실체 없는 억눌림에 분노한 그는 이내 학생들에게 ‘진실한’ 것을 써오라고 외친다. 자신이 다다르지 못한 진실 저 너머에 대한 욕구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인간 내면의 끓어오르는 순수를 지향하는 찰리가 어쩌면 인간을 구하는, 신성한 존재와도 같아 보인다.
비관적인 관객들을 비웃듯, 그는 책 한 권과 딸 엘리의 독후감 한 장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버틴다. 거대하고 불쌍한 고래에 대한 엘리의 연민을 아는 이상 어떻게든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를 믿는다. 찰리는 인간은 놀라운 존재라고 똑똑히 말한다. 어둑한 거실에서 빛나는 엘리의 녹색 눈을 보며 인간은, 그리고 너는 정말 놀랍고 사랑스럽다고 또박또박 전한다. 몸도 잘 움직이지 못하면서 가끔 찾아오는 새들을 위해 빵을 잘라 내어주는 찰리라는 인물이 지닌 모순은 사실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모순 아닐까.
찰리는 그저 운이 좋지 않아, 또는 노력이 부족해서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일까? 그의 무기력함과 엄살이 상황을 악화시켰을까? 영화를 보고 찰리에 대한 역겨움이 연민을 앞서는 경우가 많지 않았으면 한다. 누군가의 아픔을 재단하기엔 우리는 타인에 대해 너무 모른다. 한마디씩 얹어진 말들은 금세 증발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불러일으킨 과오를 붙들고 어떤 질책보다 날카로운 자책을 이어나가지 않는가.
숨 막히는 상황들의 연속을 달려 결말에 다다른 관객은 '놀랍고' '사랑스러운' 존재인 ‘인간’을 통한 구원의 순간을 목격한다. 용서만을 바랐던 고독하고 참혹한 날들을 삼켜낸 그는 엘리와 마주 보며 마침내 진실해진다. 그리고 두 발로 버티며 빛을 맞이했을 때 진정 자유로운 ‘whale’이 된다. 영화는 어떤 구렁텅이 속이더라도 사람은 서로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고 찰리의 입을 통해 호소한다. 신이 아닌 인간의 구원 능력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과오가 남긴 응어리를 품고 있는 이라면, <더 웨일>이 선사하는 정화의 눈물에 모두 흘려보내라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