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하루가 있었다.
네덜란드 흐로닝언에서 잿빛 안개로 덮인 하늘을 보며 눈을 떴다.
전날 늦게 잠에 든 거 치고는 몸이 너무 가뿐해서 당연히 오후 12시는 넘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달리 휴대폰 시계에 적힌 오전 9시 채 안 된 시각을 보고 놀라며 하루를 시작했다.
일어나서 늘 그렇듯 익숙한 레시피의 샌드위치를 싸고, 자전거를 타고, 포럼이라 불리던 공간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귓가에는 내가 엄선해서 디깅한 플레이리스트가 흘러나왔고, 차가운 겨울 공기를 한숨 가득 들이마시며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의 조각들을 눈에 담았다.
가장 좋아하는 6층 창가 자리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전날 밤 덜한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각자 노트북 앞에서 묵묵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역시 이 도시의 한 구성원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네 마트에 들러 좋아하는 과일을 몇 개 고르고, 친구들과 나눠 먹을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였다.
느리고 무해한 이 비현실적인 영화 같은 삶 속에 내가 들어와 있다는 게 이따금씩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마치 평생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익숙하게 행동했고, 그럴 때면 스스로가 놀랍기도 했다.
네덜란드에서 보낸 시간 중 가장 그리운 순간을 꼽으라면 여행을 떠났던 날도, 특별한 날도 아니다.
잔잔하게 흘러간 저 날이 그 무엇보다도 사무치게 그립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가 이어졌다. 네덜란드에서 보고 느낀 일들을 찬찬히 머금고 음미할 시간조차 없었다. 현실의 시간이 다시 재생된 것이다.
나는 아직 모든 것들과 작별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흐로닝언에서의 시간을 정리하지도,
정지하지도 못했는데
이런 메아리 같은 생각들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지금도 흐로닝언에는 내가 두고 온 내가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다.
흐로닝언에서의 기억은 달콤하지만, 동반된 상실감이 나를 따라와 괴롭혔다. 이는 아마도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그리움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나는 이를 극복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흐로닝언에 있었던 여느 때처럼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동네 도서관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좋아하던 작가의 책을 찾아 들었다.
이 모든 것이 그곳에서의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며 한 행동들이었지만, 기대했던 익숙함보다 더 짙어진 그리움이 나를 덮쳤다.
그렇게 같은 행동을 몇 번 반복하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그리움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그곳에서의 시간이 나를 이만큼 성장하게 했고, 내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감정이라면 억지로 떨쳐낼 필요가 없었다.
그리움은 결국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내 안에 남는다. 흐로닝언에서의 나는 여전히 그때 그곳에 머물러 있고, 지금의 나는 그 시간을 가끔 꺼내어 들여다보며 위로를 얻은 뒤 다시 살아간다.
언젠가 만나게 될 새로운 이별과 그리움 앞에서는 지금보다는 더 성숙하고, 담담하게 대처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가진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