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나쁜자석>은 스코틀랜드의 작가 더글라스 맥스웰이 쓴 우정극이다.
9살 프레이어, 폴리, 엘렌은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고든을 만나게 된다. 19살 고든의 자살로 인해 세 친구는 흩어지게 되고 29살의 나이가 되어 다시 만나는 과정을 그린 연극이다. 이 연극의 특별한 점은 9살, 19살, 29살의 시간대를 넘나드는 동시에 고든이 쓴 이야기 속 환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넘나든다는 점이다.
이화여대 총연극회는 2025 봄 정기 공연 작품으로 <나쁜자석>을 택했고, 원작자의 각색 허가를 받아 작업을 진행했다. 영어를 한국어로 바꾼다는 것도 큰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지만, 모든 캐릭터의 성별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꿨다는 점도 의미 있었다. 최초의 여성 <나쁜자석>이었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총연극회의 대기조인 “깨어있는 연극”과 알맞은 각색이었다. 작업의 모든 과정이 여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연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태어난 캐릭터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쌓으며 관객을 만날 준비를 해나갔다.
고든과 세 명의 친구가 관객을 만난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밀려나는 존재
고든은 누구와도 온전히 붙지 못한 존재이다. 고든은 9살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며 자란 아이이다. 사람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했고, 자신이 쓰는 이야기 속에 억압된 자기자신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프레이어, 엘렌, 폴리를 알게 되었다. 고든이 쓴 이야기를 관심갖고 들어주는 유일한 친구들이었고, 그들은 고든의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특히 폐교에서 프레이어와 단둘이 부모님께 받은 상처를 고함과 웃음으로 풀었던 기억은 고든에게 아주 소중하다.
하지만, 고든은 친구들과 함께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친구들은 고든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고, 고든의 트라우마인 술을 물처럼 마셨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보여주듯 19살 장면에서 고든은 직접 등장하지 않고, 친구들의 대사 속에만 등장한다. 고든은 친구들의 대사 속에서 뒤틀리고, 구겨진다. 고든은 프레이어와 잠시 붙어있을 수 있던 폐교에서 보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 순간 고든은 다른 극의 자석처럼 프레이어에게 붙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 짧았고 고든은 점점 밀려났다. 고든은 어떻게든 그 순간을 되돌리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에게 붙기 위해 폐교에 불을 지르고, 자살을 선택했다.
고든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기억에 남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분명 일반적인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고든의 선택이 세상과 붙어있기 위한 몸부림으로 느껴졌다. 마치 같은 극끼리 만난 자석처럼 고든은 친구들과 그리고 세상과 계속 밀려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에 고든은 자석과 같은 자신의 존재를 깨뜨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자석의 성질을 잃어버린 ‘나쁜 자석’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하겠다고 생각했다.
고든의 선택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결국 친구들은 고든의 죽음 이후로 갈라진 것을 보면 고든의 선택이 의도대로 흘러갔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고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산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렵다는 생각, 난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분명 밀려나는 존재일 것이다. 고든의 선택이 너무나 극단적임에도 고든의 속마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영역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같은 사랑을 했어
19살에 겪은 고든의 죽음 이후 세 친구는 모두 다른 길을 가지만, 똑같이 고든을 사랑했다. 각 방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엘렌 - 과거를 되돌리기 위한 몸부림 (꽃비 기계 만들기)
폴리 - 모든 사람이 고든을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 (고든 이야기 출판)
프레이어 - 고든으로 인해 멈춘 시간 (고든의 죽음을 끝까지 부정)
엘렌은 평소에도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고든이 죽은 후 폴리와 프레이어는 마을을 떠나도 엘렌은 끝까지 그곳에 남아있었다. 엘렌은 고든이 친구들에게 들려준 첫 번째 이야기인 <하늘정원>을 좋아했다. <하늘정원>은 왕이 죽은 왕비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만든 하늘정원이 부서지면서 아름다운 꽃비가 흩날리는 내용이다. 엘렌이 고향에 애정을 갖고 있는 이유는 친구들과 고든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했던 추억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추억을 되돌릴 꽃비 기계를 만들며 오랜 시간을 보낸다. 어떻게든 과거를 붙잡으려는 엘렌의 방식은 고든을 사랑하는 엘렌만의 방식이다.
폴리는 고향을 떠난 이후 출판계에서 일하며, 고든의 이야기를 출판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한다. 성공한 사업가인 폴리는 결국 고든의 이야기를 세계적으로 출판시키고,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친구들을 모은다. 폴리는 기억에 남고 싶어 하는 고든을 마음에 품고, 많은 사람에게 고든을 알리려 노력했다.
프레이어는 고든의 죽음을 10년 동안 부정해 왔다. 어린 시절의 모든 추억이 깨진다는 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프레이어에게 고든은 소중한 존재이다. 프레이어는 폐교에서 고든과 단둘이 쌓은 추억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고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마음은 폴리와의 갈등을 만든다. 폴리 또한 자기가 고든을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고든의 장례식 날 폴리는 고든 이모와 대화를 길게 나눌 만큼 고든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고, 프레이어는 고든이 비틀즈를 싫어한다고생각했지만 폴리는 고든이 비틀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경쟁심리는 둘 다 고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지만, 둘의 대화 속에 고든은 점점 친구들의 시선 속에서 뒤틀려졌다.
그래서 세 친구는 29살에 다시 만났을 때 반갑게 인사할 수 없었고, 화목할 수 없었다. 고함을 지르며 싸우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고든을 사랑한 서로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고, 자기가 고든을 가장 잘 안다는 경쟁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상처를 줄 만큼 싸운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이 추억이 서로에게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추억을 사랑하는 같은 마음이었기에 싸울 수 있었다.
방식에 집중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 있다. 사실은 같은 마음인데 사소한 방식의 차이에 집착하며 서로를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마음으로 사랑했기에 엘렌의 꽃비 기계를 화가 난 프레이어가 강제로 작동시켰을 때, 꽃비가 아름답게 내릴 수 있었다. 세 명의 친구는 그 장면을 볼 때 깨달았을 것이다. 결국 모두가 그리워하고 있는 대상과 시간은 동일하다는 것을.
우정은 끝까지 서툴고 환하게 아름다운 사랑의 방식이다. 우린 끝없이 밀려나며 서로의 방식에 대해 오해하겠지만,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꽃비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