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문학 시장에서 단편소설의 인기가 상승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2018년에 비해 2023년 중·단편 소설의 판매가 10% 이상 증가했다는 분석 자료도 있고, 전반적인 콘텐츠의 트렌드도 그러하다. 숏폼 콘텐츠가 대두되며 짧은 호흡의 콘텐츠를 선호하는 독자들이 많아진 취향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실제로 다양한 출판사들의 단편 시리즈가 흥미롭다. 2018년부터 시작된 현대문학의 ‘PIN 시리즈’, 위즈덤하우스의 ‘위픽’ 등 다채로운 단편 시리즈를 골라 보는 맛이 쏠쏠하다. 특히, 교보문고의 출판 브랜드 ‘북다’에서도 작년 여름부터 단편소설 시리즈 ‘달달북다’를 시작했다. 한국 문학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 12인의 신작 로맨스 단편소설이 키워드별로 나누어 매달 한 권씩 발간되는데, 이번에는 백온유 작가와 ‘로맨스×하이틴’ 키워드의 만남이었다.
발아하듯 싹트는 마음
좋아하는 마음은 어떻게든 티가 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틀어막은 내 마음이 걸핏하면 빛이나 연기처럼 새어 나왔듯이.
p9
이 책은 주인공 은석과 정원이 헤어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헤어짐 앞에서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한 은석과, 자기의 마음도 그러했다고 답하는 정원. 그러나 은석은 그 말의 진위 여부를 떠올린다. 정말 좋아하는 마음이었다면, 티가 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정원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그랬듯이.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더 보살펴주고자 했던 자신의 마음처럼.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순간의 느낌, 어떤 한 몸짓, 찰나의 미소. 특히 어릴 때의 좋아하는 감정을 되새겨보면, 특정한 계기를 콕 집지 않아도 어느새 스며들 듯 좋아하는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작은 세계가 전부인 것 같은 시절의 사랑이란, 어쩌면 사소한 감정 하나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균열을 일으킨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 도입부를 읽고 책을 읽으며, 정원 역시 은석을 좋아했는지에 대해 최대한 집중하며 읽고자 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어린 사랑은 별것 아닌 것으로 쉽게 치부되곤 하니까. 작은 아이들에게는 너무 소중해 제대로 쥘 수도 없고, 때로는 너무 예민해 찰나에도 상처받는 소중한 감정들이 가장 후순위로 미루어지는 것이 우리 사회니까.
가장 후순위로 밀리는 마음
정원은 폭력적인 아빠를 피해 엄마와 동생과 함께 은석의 엄마가 소유주인 맨션 지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 그 소녀를 좋아하게 되어 안 쓰는 태블릿 PC를 빌려주고 학원 자료를 나누어주고자 한 소년. 그리고 그 소년에게 같은 건물에 사는 것을 비밀로 해 달라는 말을 첫 마디로 꺼내며, 이후로 한 번도 소년의 눈에 띄지 않았던 소녀. 소년은 그런 소녀가 더 보고 싶어 괜히 소녀의 동생을 핑계 삼아 챙겨주려 하고, 그런 호의에 고마움과 더불어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소녀.
이 단편소설이 참 슬프게 느껴졌던 이유는, 정원 역시 은석을 진정으로 좋아했느냐는 은석의 질문에 대신 해답을 찾기 위해 열심히 뜯어 읽었음에도, 그것이 별로 중요한 문제로 상정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년과 소년이 주도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메인 플롯은 어른들의 사정이다. 그 속에서 소년과 소년은 정원에 숨어든 민들레 홀씨처럼 조용하게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랑이 비루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비천해서였을까.
p70
이 대목을 읽고 가슴이 잔잔하게 시려왔다. 오롯이 그 감정에 책임을 질 수 없었던 사랑. 오롯이 그 마음에 충실하지 못했던 사랑. 두 사랑 중 어느 사랑이 더 비루할까? 남들이 다 편하게 살아가는 사회가 왜 우리에겐 작은 사랑조차 가꿀 수 없는 남루하고 비천한 세계가 되어버리는지. 어리고, 작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책임을 질 수 없는 아이들의 소중하고도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 느껴졌다.
떠난 뒤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마음
정원이 떠난 후에 나는 비로소 정원을 가꿀 수 있었다.
가련하지 않은 정원, 취약하지 않은 정원, 향기로운 정원, 울창한 정원에 대하여.
p71
정원이라는 소녀가 실제로 눈앞에 존재했을 때는, 소녀를 보기 바빠 정원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정원이 가고 나서야 진짜 정원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정원을 사랑했지만, 아무 보호막도 없이 덜렁 방치된 정원을 가꾸어줄 생각은 못 했던 사랑. 서툴렀기에 냅다 정원이 예뻐 보이는 겉치레를 두는 것이 마음이었지만, 사랑은 처음부터 산산이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떠나고서야 알게 된 마음.
다른 출판사의 단편 시리즈보다 더 얇고 가벼웠지만, 결코 내용이 적고 느슨하지 않았다. 오히려 뚜렷한 중심 메시지와 단단한 마음이 느껴져 기분 좋은 설렘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살면서 한 번쯤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되어 억울한 마음을 가졌던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잔잔한 위로가 아닐까. <유원>에 이어 <정원에 대하여>, 그리고 다음 백온유 작가의 작품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