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도, 뮤진트리에서 출간한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시리즈를 읽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이 프로젝트의 취지 즉, 출판사의 초청을 받은 작가가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화가와의 정서적 교류를 나눈 경험을 써 내려간 에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책을 받아 들었다. 그림에 대한 설명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문학적이고 시적인 문장들이 많아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문장과 문장을 읽어 내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 책의 취지를 알게 된 후에도 꽤나 독서가 쉽지 않았기에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를 좋아하던 터라 그의 그림에 관한 타인의 시선을 담은 책 <블루 베이컨>에 깊은 호기심이 일었다.
책 <블루 베이컨>은 유려한 필치로 다양한 소설과 글, 특히 미술에 관한 글을 꾸준히 발표해 온 작가 야닉 에넬이 2019년 퐁피두 센터 미술관에서 진행된 '베이컨 특별전'에서 보낸 어느 고독한 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과거에도 베이컨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해온 그였기에, 베이컨과 단둘만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은 흥분 그 자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에 작은 손전등과 베이컨이 생전에 읽었다는 책 한 권,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도구들을 챙겨 미술관으로 향한다.
하지만 저자의 밤은 쉬이 지나가지 않는다. 베이컨의 그림들과 제대로 마주하기 전, 때때로 찾아오는 안과적 편두통과 먼저 조우한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에 빠진다. 지금 이 상태에서 약을 먹게 되면 온전한 정신 상태로 그림을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고통에 굴복하고, 평소에 복용하던 트라마돌 두 알을 삼키고, 다소 불안정한 상태로 베이컨의 그림들과 마주한다.
정육점에 걸린 고기, 썩은 살점.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기괴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그린 인물은 뒤틀려 있고 그가 그린 세상은 어둡고 칙칙하다. 그런 그의 그림과 한밤중에 마주한다면, 공포심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저자가 느낀 안과적 편두통 또한 무의식적인 공포심으로부터 발현된 것은 아니었을까? 다행히 트라마돌은 이내 효과를 발휘한다.
몽상인 듯 현실인 듯
책 <블루 베이컨>은 몽상과 현실을 넘나들듯, 저자가 미술관에서 직접 경험한 일과 과거의 회상 및 당시의 감각 등이 뒤섞여 있다. 따라서 독자로 하여금 '과연 그가 진정 그림을 보았는가?' 의문을 품게 만든다. 실은 편두통 때문에 제대로 그림을 감상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그가 그 순간 보고 느낀 모든 것은 단지 그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상상은 아니었을지 의심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베이컨의 그림을 평소부터 유심히 보아왔고 좋아했으며, 그 안에서 본인만의 해석과 의미를 찾아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대부분 죽어 있다고 말하는 베이컨의 그림 속에서 생명력을 발견하는 사람,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는 베이컨의 행적에서 숨은 뜻을 읽어내는 사람이 바로 저자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몰입을 잘 드러내는 그림이 바로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Water from a Running Tap)'이다. 그림 속 수도꼭지와 물, 그리고 그림의 전반을 이루는 파란색은 그림이 탄생한 당시의 상황에서 시작하여 저자의 어린 시절과 그날 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점으로 저자를 이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압도된 그는 심지어 실제 콸콸 쏟아지는 물을 두 눈에 맞는 듯한 느낌을 받기에 이른다. 가히 놀라운 몰입이 아닐 수 없다.
책 <블루 베이컨> 속에는 어두운 밤중에도 그림과의 굉장한 교감을 경험한 저자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저자는 당시의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글로 옮기고자 했다 말한다. 안과적 편두통을 앓는 것으로 시작된 밤이었기에 그날 느낀 어지러움까지 글 속에 녹여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따라서 두께는 얇지만 읽는 속도는 느린 책이었다.
저자는 베이컨의 그림을 소재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았던 것 같다. 실제 본 책 역시 베이컨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무언가 하나를 깊게 좋아하게 되면, 푹 빠지게 되면 현실 감각을 잃게 될 때가 있다. 어쩌면 저자에게 그날 밤은 현실적이지 않은 이벤트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책 <블루 베이컨> 속 몽상과 현실의 애매한 경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