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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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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조명 가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항상 같은 시간, 같은 정류장에 앉아 있는 한 여자, 이지영(김설현 분).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의 밤, 그녀가 신경 쓰이던 현만(엄태구 분)은 지영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지영은 그의 집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항상 그녀와 함께하던 커다란 캐리어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은 가죽 가방을 꺼낸다. 커다란 바늘을 든 지영의 손톱은 제 위치가 아닌 손가락 아래에 붙어있다.


‘그곳’의 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하다. 갑자기 몸이 길어지는 여자, 눈이 여러 개로 분열되는 형사, 온몸에서 물이 흐르는 버스 기사,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리가 무너지는 학생. 그곳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어두컴컴한 거리에서 유일한 빛을 내뿜는 조명 가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할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


 

내세가 존재한다고 믿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보다야 죽음 이후에도 어딘가에서 나름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고 믿는 편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현생 이후의 삶이 이어지는 그곳, 조명 가게가 있는 그곳은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말이 조금 모순적이지만 조명 가게의 주인인 정원영(주지훈 분)의 말을 빌리자면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니까. 사후세계에서 이상한 모습을 한 사람들은 아직 그곳에 속하지 않은,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죽거나 살거나가 결정되는 건가요?"

 

"이 곳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마. 그곳에  머무르거나, 돌아오거나."


경계에 있다는 것은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곳은 목적지가 아닌 지영이 앉아 있던 정류장과 같은 곳이다. 정류장에 내려 다음 버스를 기다릴 수도, 해당 정류장에서 여정을 마무리할 수도 있다. 지영이 하필 버스 정류장에서 현민을 기다렸던 것은 자꾸만 정류장을 지나쳐 그곳에서 여정을 끝내려는 현민을 어떻게든 멈춰 세우려는 의지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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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곳,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에는 비가 많이 온다. 버스 사고가 났던 그날도 비가 왔기 때문일까. 비는, 그보다도 비로 인해 생겨나는 우산은, 그곳에서 사건의 다정한 촉매제로 기능한다. 현민이 지영에게 우산을 건넸듯 어린 학생, 현주(신은수 분)는 같은 어두운 골목을 지나는 혜원(김선화 분)에게 선뜻 우산을 함께 쓰기를 권한다. 현생에서의 작은 인연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주에게 그곳에서 혜원은 완벽히 모르는 사람이었음에도 말이다. 이 다정한 참견은 결국 이들을 살린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액체인 비는 곧 하늘에서 내리는 눈물이다. 사고가 난 버스의 기사, 오승원(박혁권 분)의 죄책감에서 비롯된 눈물은 범람하는 빗물처럼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운다. 그렇게 모든 미련과 슬픔을 쏟아내고 또 쏟아낸 뒤에야 죽은 이들은 그곳에서 머무른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덜컹이는 기차에 기대어

너에게 편지를 쓴다

꿈에 보았던 길 그 길에 서 있네


바람이 불어오는 곳 - 김광석

 

 

승원은 버스에 탔던 남학생, 지웅(김기해 분)을 조명 가게로 업어서 데려간다. 지웅이 거리를 지날 때마다 흥얼거렸던 노래는 그가 결국 그곳이 아닌 이곳으로 돌아올 것임을 암시한다. 그곳과 이곳. 비가 왔던 그곳으로 이곳에서의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그 통로가 되는 조명 가게. 조명 가게에 있는 빛은 강렬한 의지가 바탕이 되어야 발견할 수 있다.



 

의지라는 건 혼자만의 것은 아닐지도


 

중환자실의 간호사, 권영지(박보영 분)는 그 경계에 존재했던, 그리고 노랫소리에 이끌려 다시 돌아왔던 사람이다. 그녀는 이 의지라는 것이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환자들에게 같은 일을 해주기로 한다. 영지는 말한다.


“빛을 찾아야 해요!“


이 외침이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이미 경계를 지나 죽음이 확정된 사람들에게 닿음으로써 의지가 전달되는 단계는 한 번 더 추가된다. 엄마에게서 딸에게로, 여자 친구에게서 여자 친구에게로, 혹은 여자 친구에게서 남자 친구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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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관계, 예견된 눈물임에도 결국 저항 없이 울고 마는 것은 인물들이 내리는 결정이 결국 보는 이의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였던 마지막 두 화에서 오히려 메인이라면 메인인 지영과 현민 커플의 결말부가 흐릿했다. 속편을 위한 의도된 여백일 수도 있지만 현민이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우유부단함도 한몫한다.


빛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들은 남아있는 자들의 의지는 모두 공통되게 강렬하다.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 반면 경계에 있는 자들의 의지는 모두 다르다. 그것이 결말의 차이로 이어진다. 현주는 돌아가되 어머니를 잊지 않았고, 선해(김민하 분)는 혜원과 함께 하기 위해 스스로의 조명을 깨버린다. 모두의 의지가 같은 방향일 수는 없다. 하지만 현민의 경우, 그 의지 자체가 흐릿하다. 지영의 말에 따라 ‘본인의 의지로 빛을 찾는 것처럼’ 연기했던 현민은 돌아온 뒤에도 지영을 기억하지 못하고 섬망 치료를 받아도 섬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환하게 빛을 비추고 있는 조명 가게는 그 존재만으로도 의지를 가지게 도와주는 공간이다. 온통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밤만이 반복되는데, 유일하게 온갖 빛이 모여있는 장소라니. 오직 ‘스스로’의 의지로 불빛을 찾아야 한다는 원영의 말과는 반대로 아주 약간의 의지만 있다면 본능적으로라도 이곳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후세계 곳곳에 켜져 있는 조명 가게의 불빛은 의지라는 것이 홀로 발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한다.


조명 가게에 켜진 빛은 경계에 선 이들의 의지를 기다린다. 그것이 작던, 크던, 혹은 타의에 의한 것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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