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예술은 그것을 접하는 시공간에 따라 다른 서사와 맥락이 드러나며, 이를 발굴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최근 감상했던 작품 중 나에게 그러한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 작업은 김아영 작가의 <딜리버리 댄서의 구> (2022)다. 작가 김아영은 미디어, 소설, 설치 등 다중 매체로 구성된 세계관을 통해 현존하는 사회 문제에 대한 다학제적 접근을 시도해왔으며, 해당 작품의 2024년 ACC 미래상 수상을 계기로 지난해 8월 차기작인 딜리버리 댄서의 선:인버스(2024)를 발표했다. 이번 기고문에서는 차기작과 함께 다시 주목받고 있는 <딜리버리 댄서의 구> (2022)¹와 연작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 (2022)을 재조명하여 작품이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생산하는 내러티브를 탐험해보고자 한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 2022, 1채널영상, LED 패널영상, 약 24분
오리엔탈 퓨처리즘 세계관의 여성 배달 기사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오리엔탈리즘과 아시아 퓨처리즘이 섞인 가상의 서울에서 살고 있는 여성 ‘에른스트 모’가 배달 플랫폼인 ‘딜리버리 댄서’에서 배달 라이더로 일하며 발생하는 내용을 다룬다. ‘딜리버리 댄서’들은 수많은 최단거리의 배달경로를 제공받아 배달 콜 업무를 수행한다. ‘딜리버리 댄서’에서 경력이 쌓이면 극소수의 라이더들은 물리적 거리를 초월하여 마치 빛이 사물에 도달하는 것처럼 압축된 시공간의 틈으로 이동하는 최고 등급의 배달 라이더인 ‘고스트 댄서’로 활동할 수 있다. 에른스트 모 또한 고스트 댄서로, 배달을 하던 어느 날 다른 시공간의 자신과 똑같은 존재인 ‘앤 스톰’²을 만나게 되며 혼란을 겪고 ‘고스트 댄서’의 지위를 잃을 위기에 처하며 내적 갈등을 겪게 된다.
긱 경제(Gig economy)에 대한 비판
앤 스톰의 정체, 에른스트 모의 미래, 두 인물의 재회 여부 등 궁금증을 남기며 열린 결말로 끝나는 약 24분 분량의 영상은 자본주의와 인간성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양립할 수 밖에 없는 동시대 사회에서 우리의 제도와 가치관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 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긱 경제(Gig, economy)³에 기반한 한국의 배달 노동 시스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 상황들을 은유한다. 특히, 이 작품의 제작시기는 Covid-19가 유행하여 전세계인이 변화된 일상을 경험하던 시기로, 당시 한국은 비대면 시스템 활성화와 외출을 자제 정책으로 인해 배달 사업이 활성화되어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노동권 이슈가 자주 제기되었다. 작중 에른스트 모의 독백인 ‘딜리버리 댄서의 중앙시스템은 지도에 표시되는 X축과 Y축의 위치만 고려할 뿐 실제 길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변수들과 우리들이 오르내리는 Z축의 계단들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실제 배달노동에 종사하는 라이더들의 고충을 반영한 대사다. 배달한 만큼 수익을 얻을 수 있고, 신속하지 않으면 패널티가 발생하는 시스템은 라이더들을 경주마에게 채찍질하듯 몰아세운다. 이 과정에서 근무조건이 열악한 배달대행사에 소속되거나 개인적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라이더들은 그들의 인간성을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된다. 돈을 우선시하게되면 인간 사회가 형성한 도로 위의 규범을,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의 안전을, 신호등의 빨간 불빛 앞에서 그들의 신체를 바쳐 수익을 얻는다. 마치 고스트 라이더가 시공간을 넘나들어 빛의 속도로 배달 업무를 수행하듯 제도와 도덕성을 넘나들며 오토바이의 속도에서 느껴지는 신속함에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배후에는 그들이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부추기는 고용주와 자본주의가 있다.
에른스트 모(Ernst Mo), 앤 스톰(En Storm), 고스트 댄서(Ghost Dancer): 인간성에 관한 고찰
그래서 앤 스톰과 고스트 댄서는 주인공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주인공 에른스트 모를 구성하는 두 가지 정체성, 의문의 인물 앤 스톰은 그녀의 인간성을, 고스트 댄서는 극한의 자본주의를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라이더의 명칭에 유령(ghost)가 들어간 것, 에른스트 모와 앤 스톰의 이름 철자가 ‘Monster’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Ghost’와 ‘Monster’는 인간의 형상을 갖출 수는 있으나 인간은 아니다. 작가는 주인공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대상의 명칭을 ‘Ghost’와 ‘Monster’에서 가져옴으로써 자본주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인간성’을 지니며 살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에른스트 모는 앤 스톰(인간성)을 마주할수록 고스트 댄서(자본주의)가 주는 막대한 금전적 이익으로부터 멀어지고 둘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에른스트 모는 자신의 일상에 혼란을 가져오는 앤 스톰을 죽이게 되는데, 이 때 앤 스톰은 ‘무수히 많은 배달지점으로 이동하는 한 지점에서 둘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남긴다. 이는 에른스트 모가 고스트 댄서(자본주의)의 삶을 지향하더라도 어떤 한 지점, 가령 실제 사회 속 빨간 신호가 켜진 도로, 행인 걷고 있는 길가 등에 해당할 배달 경로의 사소한 지점에서 도덕과 제도를 외면하는 행위를 멈추고 자본 못지않게 존중되어야 하는 가치들을 상기한다면 그녀는 언제든 인간성(앤 스톰)을 되찾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다.
다른 시간에서 작품 감상하기: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딜리버리 댄서의 구가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작가가 Covid-19로 인해 자택에서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며 시간을 보냈던 경험을 바탕으로 시작된 작업이다. 포스트 코로나를 거치며, Covid-19로 인해 감축된 노동 인력은 저하된 서비스의 질과 개인에게 과중되는 업무 부담의 문제를 낳고 있다. 높은 환율과 경기 침체로 일시적 고용경제 체제도 지속되고 있다. 최근 일부 기업이 주말과 새벽에도 운영하는 물류 서비스를 개시하며 긱 경제의 노동권 문제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Covid-19가 가져온 비대면의 일상은 회복되었지만 가성비 높은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2024-2025년의 한국 사회에서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효율과 생산성이 강조되는 노동 환경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노동’의 중요성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 (feat. 1172 캐릭터 일러스트레이션), 2022, 월페이퍼시트지_갤러리현대촬영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 (feat. 1172 캐릭터 일러스트레이션), 2022, 월페이퍼시트지_2024 프리즈런던촬영
다른 공간에서 작품 감상하기: K-서브컬쳐로 확장하는 퀴어 서사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갤러리 현대에서의 전시 이후, 2024 프리즈 런던이 기획한 영향력 있는 예술가들이 다음 유망 세대를 지목하여 미술계의 전망을 선보이는 ‘Artist to Artist’ 섹션에서 양혜규 작가의 지목을 받아 단독 부스에서 전시되었다. 프리즈 런던에서 작품이 소개된 주요 키워드는 ‘노동’, ‘긱 경제’, ‘여성’ 그리고 ‘퀴어’였다. 에른스트 모와 앤 스톰의 관계성이 해외에서 퀴어 서사로 소개된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딜리버리 댄서의 구>의 연작인 월페이퍼 시트지를 사용한 평면 설치 작품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 (feat. 1172 캐릭터 일러스트레이션)> (2022)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Covid-19로 대부분의 시간을 자택에서 보내던 시기에 접했던 GL⁴웹툰에서 영감을 받아 실제 웹툰작가와 협업하여 해당 작품을 제작했으며 월페이퍼의 화면은 동성애 로맨스 장르웹툰 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연출과 구도를 전유하고 있다. 서울 삼청동에 소재한 갤러리 현대에서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는 ‘퀴어’보다는 한국 웹툰이 직관적으로 연상되는 문화적 코드에 공감하며 감상했다. 반면, 프리즈 런던에서 지구 반대편의 청중들과 이 작품을 다시 마주했을 때는 퀴어 서사라는 보편적 의제로 작품을 바라보게 되었다. 서로 다른 공간적 무대에서, 한국의 서브컬쳐가 반영된 문화적 ‘특수성’은 약화되었으나 그것이 내포한 다양한 성적 지향의 반영은 보다 광범위한 청중들과 공감을 이루는 매개체로 작용하고 있었다.
차기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를 기대하며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자본주의 체제하의 노동권 문제와 퀴어서 사를 통해 비선형적 시공간에서 제시하는 보편적인 시사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에 생산된 양질의 예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차기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가 공개되며 에른스트 모와 앤드 톰의 서사는 배달부로서, 퀴어로써 보다 광범위한 확장의 가능성을 지닌다. 차기작은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의 전당, 베를린의 함부르크 반 홉(Hamburg Banhof), 뉴욕의 모마(MoMa) 등 각지의 미술관에서 전시되는데, 감상 후 비평문을 쓰고 싶었으나 작품과 인연이 없는 것인지 광주에도, 해외에도 갈 기회가 없었다. 언젠가 전시공간에서 직접 마주할 날을 기다리며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를 찾아보지는 않았으나, 포스터에 최근 다양한 분야에서 유행과 논쟁을 불러온 AI 이미지가 삽입된 것을 보며 차기작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문화적, 시대적 코드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온 상태다. 에른스트 모와 앤드 톰의 새로운 이야기가 선사할 즐거움이 기대된다.
1. 일부 플랫폼에서는 딜리버리 댄서의 구가 영화로 등록된 ‘2023’년을 작품 연도로 표기하고 있으나, 해당 작품은 김아영 작가의 소속 갤러리인 갤러리현대에서 2022년 ‘문법과 마법’이라는 전시에서 소개된 바 있다.
2. 에른스트 모(Ernst Mo)와 애니 스톰(En Storm)은 같은 철자로 구성되어 있다.
3. 기가 경제(Gig economy), 사회에 정규직보다 계약직 및 프리랜서 등 임시직 고용형태가 증가하는 경제 상황을 의미하며, 특히 온라인 플랫폼에서 운영되는 배송, 드라이브 서비스노동산업을 일컫을 때 주로 사용되는 용어다.
4. ‘Girls Love’의 약자. 퀴어 여성들의 사랑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장르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