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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2003년에 개봉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작품, <몽상가들>은 표현의 자유를 갈망하고 자신들의 영화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1968년 봄, 프랑스어를 공부하러 간 영화광매튜의 환상 스토리이다. 성장이 멈춘 아이들처럼 몽상 속에서 사는 테오, 이사벨과 함께 지내면서 매튜 또한 몽상의 세계로 입성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온 매튜는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끝내 그들의 곁을 떠난다.


먼저 <몽상가들> 속 몽상가들이란 누구인가 명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몽상가들은 테오와 이사벨, 쌍둥이 남매이다. 매튜를 몽상가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몽상을 실현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졌으며 현실을 완전히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뿜어내는 몽상의 향기에 흠뻑 취했다. 그 향기는 우리가 눈을 뜨기 전부터 존재했던 규칙과 상식으로 더럽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무구한 사랑은 투박하고 모호하다. 이를 통해 매튜는 잠시 밖의 세상을 잊기도 했다. 우리는 한 번쯤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뛰어놀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을 동경한다. 내가 그려낸 상상 속에서 현실의 고민들을 잊고 싶어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현실로 돌아가 바쁘게 발을 구른다. 먹을 것이 떨어져 음식물 쓰레기에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먹었던 그들처럼 몽상은 우리를 배고프게 하기 때문이다. 세상과 현실 또한 몽상에서 벗어나기를 계속 강요한다. 몽상은 현실을 모르기에 모순적이다. ‘모순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테오의 대사 때문이다. “총이 아닌 모택동의 어록이 담긴 작은 책 한권을 들고 폭력이 아닌 문화로 싸우는 것은 아름답다.” 이에 매튜는 매정하게 답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틀렸어. 그들이 믿는 건 책이 아니라 단지 독재자의 어록일 뿐이야.” 논리성과 객관성 그리고 현실을 잊고 사는 테오는 세상을 모르기에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매튜도 쌍둥이를 사랑했지만 떠난 것이다. 영원히 그들 곁에서 그들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착각과 거짓된 희망을 버리고.


그들의 사랑은 영화라는 시각예술작품으로 표현된다. 영화로 이루어진 영화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은 ‘퀴즈’라는 방식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거나 자신들이 사랑하는 영화 속 한 장면을 계속하여 묘사한다. 매튜와 쌍둥이 남매의 첫 만남 이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이사벨이 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이 처음으로 한 말을 알려준다.“뉴욕 헤럴드 트리뷴!”,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이다. 보통의 첫 인사와 완전히 달라 이질감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에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영화관에서 자주 마주친 그녀가 거짓 없이, 진심으로 영화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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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난 매튜 앞에서 이사벨은 영화 <크리스티나 여왕>의 한 장면을 따라한다. 방의 가구들을 손으로 만지며 그것들의 촉감을 기억하려는 행위로 그레타 가르보가 길버트에게 작별 인사하는 장면이다. 갑작스러운 이사벨의 묘사를 시작으로 둘은 대사를 맞추며 서로를 알아갔다. 이를 통해 이름, 자신과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더 단단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매튜와 테오, 이사벨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장 뤽 고다르의 <국외자들>의 기록에 도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9분 45초만에 뛴 영화 주인공들의 기록을 깰 수 있는지에 대해 일종의 ‘테스트’로 매튜에게 제안하지만 그는 섣불리 허락하지 않는다. 매튜는 미국에서 온 이방인이었고 문제가 될 시 언제든 추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과 몽상에 더 머물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 테스트에 참여한다. 9분 45초라는 기록을 깬 그들은 “이제 우린 한 팀이야.”라고 외친다. 이 또한 고전영화의 한 장면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몽상가들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거장들의 작품들을 그냥 지나친다는 점이다. 그것들이 자아내는 고고함, 권위를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테스트, 즉 기록을 깨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명화는 그들의 달리는 행위를 꾸며주는 한낱 장식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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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시각예술작품을 묘사하거나 재현한 다른 영화들과 <몽상가들>의 차이점은 주체성과 인식이다. 대개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시각예술작품을 묘사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인식이 없다. 대표적인 예시로 피터 위어의 1998년작 <트루먼 쇼>의 한 장면이 있다. 감독과 관람객만이 르네 마그리트의 <달빛 아래의 건축물>을 묘사하고 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감독이 정한 미장센에 따라 갈 뿐, 주체성을 가지고 명화를 묘사하지 않는다. 묘사를‘당하는’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단순히 시각예술작품의 구도 속에서 의식 없이 살아가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걸작임을 분명히 알고 직접 구현하거나 비튼다. 앞서 말한 사랑 표현법과 매튜의 방에 걸려있는 <7월 28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얼굴 위에 당시의 스타였던 마릴린 먼로의 얼굴 사진이 붙어있다. 당시 세대의 미인이라고 불렸던 여인의 얼굴로 가림으로써 명화가 가지고 있는 고귀함을 무시하고 비튼 것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이 주체성과 인식을 가지고 직접 묘사하거나 체험하는 것은 2012년에 개봉한 우디 앨런의 작품,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20년대 예술과 파리를 사랑한 길 펜더는 혼자 거닐던 골목에서 우연히 차를 타고 도착한 곳에서 1920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을 만난다. 그곳에서 자신의 뮤즈인 아드리아나를 그린 피카소의 작품을 마주한다. ‘역시 피카소야, 대단한 작품이야.' 극찬을 받는 지금과 달리, 작품이 그려졌을 당시에는 미묘함과 은근함을 표현하지 못했다고 혹평 받는다. 작가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길은 피카소의 작품이 오늘날 명작으로 추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현시대로 돌아온 그는 피카소라는 거대한 가림막을 없애고 온전히 작품과 맥락으로 그것을 평가한다. 이는 작품을 작품이 아닌 작가의 위엄과 기세만으로 섣불리 평가하는 현대 사람들의무비판적인 태도를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명작과 그것을 재현하는 데 이용된 대상이 아니라 명작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작품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몽상가들>의 시각예술작품 재현은 이전 시대에 대한 동경과 사랑을 표출하는 역할을 한다. 매튜와 테오, 이사벨이 재현한 장면의 영화들은 대부분 1930년대 작품이다. 1960년대 후반의 젊은이들이 왜 당시의 작품이 아닌 과거의 작품을 찾아보고 퀴즈까지 내며 그것들을 기억하고 사랑했을까? 아버지와의 생각 차이로 말다툼을 한 테오에게 매튜는 부러움을 느낀다. 이에 이사벨을 이렇게 말한다. “다른 집 부모는 다 좋아 보이는 법이지. 이상하게 할머니,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멋져.”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2010년대의 길 펜더는 파리의 전성기로서 1920년대를 갈망한다. 그리고 1920년대에 살고 있는 아드리아나는 벨 에포크(belle époque)의 시작을 1890년대라고 생각한다. 왜 이들은 자신의 시대보다 이전 시대를 더 사랑하고 원하는 것일까? 새로움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새로움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경이로움을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찾는다는 건 아이러니할 수 있다. 그러나 일종의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각예술품을 통해 경험하지 못한 것에서 새로움을 느끼고 현시대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감정들을 체험하면서 새로움에 대한 욕구를 해소할 수 있다. 몽상가들과 길, 아드리아나는 과거 속 사람들과 그들의 작품에서 새로움을 찾았으며 이것이 이미 지나간 시대에 대한 동경과 사랑으로 표출된 것이다.

 

영화의 존재 의미가 현실과 세상을 망각하고 감정에 충실하는 것이라면 테오와 이사벨이 곧 영화일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영화 속 주인공을 꿈꾼다. 영화가 현실의 고통과 고뇌를 잊게 해주는 마취제라면 언젠가 분명히 그 효과가 다하여 꿈에서 깨어날 것이다. 영화의 여운이 아스라이 사라질 때쯤 관람자는 현실로 돌아간다. 테오와 이사벨이라는 영화를 본 관람객인 매튜도 그 여운이 다하여 그들의 곁을 떠나 현실로 돌아간다. <몽상가들>은 온전히 호기심만으로 살아가는 쌍둥이의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와 현실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영화와 관람객 간의 관계를 그들에게 투영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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