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BURNING, 2018)은 감독의 말처럼 ‘요즘 젋은이들 이야기’다. 감독은 종수, 해미, 벤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가 생각하는 이 시대의 청춘을 그려낸다. 배달 일을 하며 작가를 꿈꾸는 종수, 삶의 의미에 목말라 아프리카로 떠나는 해미, 위대한 개츠비 같은 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자세히 보면 무척이나 닮은 모습으로 이 시대의 청춘을 대변한다.
고단한 청춘 그리고 외로움
무거운 짐을 옮기는 종수의 뒷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청춘의 고단함을 가장 먼저 보여준다. 짐에 짓눌린 종수의 어깨가 사라진 후 타성에 젖은 듯 호객행위를 하는 해미가 나타나는데 이 둘의 첫 만남은 이렇게 자신의 밥벌이를 하는 도중 이루어진다.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하는 종수, 카드빚에 허덕이는 해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몇 번’으로 만 불리는 이름 없는 일꾼이며 그들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노동력' 으로 존재한다. 해미가 말하는 ‘리틀 헝거’가 물질적으로 굶주린 자들이라면 이들은 이러한 점에 있어서 리틀 헝거의 모습과 비슷하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더 가야하는 작은 방에서 가족을 떠나 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온전히 자신을 기대고 가치를 인정받을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흡수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로 완전한 타인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해미의 존재가 종수에게 절실해지고 해미에게 믿을 사람이란 종수 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진실과 의미의 추구
영화 속 청춘은 진실과 의미를 추구한다. 이방인의 불안은 이들로 하여금 진실에 목매게 만든다.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떤 확실한 것을 구할 수 밖에 없다. 영화 초반 아무런 의지도 갖지 못한 종수가 가장 능동적으로 변한 순간은 '진실'을 알기 위해 뛰던 순간이다. 집 앞 우물에 빠진 적이 있다는 해미의 말을 들은 이후 종수는 우물의 진실을 파헤치는데 해미의 가족들과 이웃사람들 그리고 그리워하던 엄마에게 우물의 존재에 관해 묻는다. 그가 묻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그 우물이 진짜 거기에 있었는가’ 다. 우물의 유무에 관해 반복적으로 묻는 그의 행위는 나중에는 다소 강박적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그에게 진실의 확인이 얼마나 중요한지 드러나는 부분이다.
비닐하우스를 불 태운다는 벤의 이야기를 듣은 종수는 매일같이 비닐하우스를 살피러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그는 며칠동안 반복해서 비닐하우스를 확인한 후 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해서 나는 매일 마을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확인했지만 당신의 말처럼 태워진 비닐하우스를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이 정말 비닐하우스를 태웠다면 내가 그것을 봤을 텐데.” 그에게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는 벤이 말한 대로 ‘비닐하우스가 태워질 것인가’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부시맨들에게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가 있대.
리틀헝거와 그래이트 헝거.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래.
왜 사는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거를 늘 알려고 아는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그레이트 헝거라고 부른대."
진실을 찾는 것은 종수의 일만이 아니다. 종수와 마찬가지로 해미 또한 진실을 추구한다. 해미는 자신의 삶의 진실, 진정한 삶의 이유를 확인하고자 한다. 판토마임을 하며 가짜를 진짜처럼 연기하는 가장 가짜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가 삶의 진짜 이유를 찾는 것은 왠지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는 누구보다 삶의 진실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더욱더 그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영화 전반에 나타난 인물들의 반복적인 진실 추구는 단순한 대상 그 자체의 진실을 넘어서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불안한 사회 속에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으로 이어지는 듯 보인다.
결핍
<버닝>은 결핍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종수와 해미 벤은 모두 각자가 가진 결핍의 상징이다. 영화는 그들 자신이 스스로의 결핍을 채우는 방식으로 시작하고 끝이난다.
삶의 의미에 목말라하고 그 의미를 찾기 위한 여행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는 해미는 영화 전반에 그 결핍이 분명해 보인다. 반면, 종수의 결핍은 이전에는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그와 모든 면에서 대조되는 벤의 등장으로 점차 수면위로 떠오른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종수 앞에 나타난 모든 것을 가진 벤은 종수가 애써 외면한 모든 결핍들을 차례로 환기시킨다.
그 첫 번째는 모성애다. 종수의 엄마는 어릴 적 종수를 두고 떠났으며 종수는 그런 엄마의 옷을 아빠의 강요로 태워버렸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엄마의 옷가지를 태우는 악몽에 시달린다. 하지만 집을 떠난 엄마를 그의 마음에서까지 몰아내지 못했기에 엄마의 빈자리가 늘 그의 마음을 괴롭힌다. 이런 모성의 부재는 집 안에서 엄마를 대신하는 암송아지에 의해 상징되는데 매일 암송아지에게 여물을 먹이는 종수의 반복된 행동은 아직 떨쳐버리지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종수의 모성애의 결핍은 여성에 대한 결핍과도 연결되는데 이는 종수가 해미라는 여성을 대하는 방식에서 잘 나타난다. 영화에서 종수는 해미 앞에서 매우 서툴다. 그의 서툶은 종수가 해미와의 관계에서 스스로 콘돔을 끼지 못해 도움을 받는 장면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진다. 이 장면은 여자에 익숙하지 못했던 종수의 과거의 삶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의 삶에서 어머니의 부재가 여성에 대한 부재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결핍을 채우듯 그는 해미가 떠난 방에서 자위행위를 반복한다.
노동하는 삶과 거리가 먼 벤의 등장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 종수의 결핍을 드러낸다. 넓고 잘 정리된 고급빌라에 살며 포르쉐를 몰고 그림을 배경삼아 가족들과 식사를 즐기는 벤과 같은 인물은 언제나 굶주린 종수와 해미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술자리 영수증에도 한숨이 나오는 종수와 달리, 벤은 처음 본 종수와의 저녁식사도 흔쾌히 계산하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며 여행을 가기위해 돈을 모아야하는 해미와 달리, 언제든지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듯 그들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망각하며 살아가려는 청춘들 앞에 나타난 모든 것을 가진 벤은 그들이 갖지 못한 것을 확인시킨다.
하지만 많은 것을 가진 그가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재미를 추구하고 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재미가 없다. 그에게는 물질적인 여유가 있지만 가슴뛰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 소리'를 찾아다닌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세상은 수수께끼 같아요"
- 종수
이 영화는 모호함의 영화다. 우리는 영화를 본 후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하는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국에 정답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 영화를 수수께끼로 만들기 위한 감독의 의도적인 영화 기법이다. 종수와의 술자리에서 해미는 귤 판토마임을 보여준다. 존재하지 않는 귤을 먹는데도 입에 침이 고이고 정말 맛있다고 말하며 그러기 위해선 ‘귤이 존재하지 않음을 잊어버리는 것’이 핵심이라 한다. 영화는 이러한 귤 판토마임이 곧 영화 자체가 전개되는 방식과 맞닿아 있음을 강조하려는 듯한 연출을 줄곧 선보인다. 종수가 ‘보이지 않는 고양이 ‘보일이에게 밥을 주는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서 종수가 벤의 아파트에서 보일이를 부르며 고양이를 만나는 장면과 연결되고, 종수네 집에 계속해서 목소리 없는 전화가 걸려오는 장면은 종수가 엄마와 재회하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장면의 연쇄에서 우리는 마치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았던 것이 비로소 보이고 들리게 되었다고 믿게 된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고양이 보일이가 사실은 존재하는 것이었고 이전부터 전화를 걸어 대답하지 않던 사람은 엄마였다고 자연스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에는 실제로 그러하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으며 우리는 감독이 의도적으로 연결시킨 장면들에 의해 사건에 어떤 연관성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믿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영화의 모호함에 각자 나름의 판단을 연결시키며 그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 나간다. 수수께끼에서 의미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나에게 결핍은 어떤 것이었고 내가 믿는 진실은 어떤 것인가? 해미가 말한 삶의 의미를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의 모습을 영화를 보는 내게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인생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걸 늘 알려고 하는 사람. 결국 이 영화는 '왜 사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시작으로 '왜 살아가는지 알기 위해 살아가는 삶'을 그 답으로 제시하고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