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착]이라는 어휘는 세 가지의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구멍을 뚫음. 2. 어떤 원인이나 내용 따위를 따지고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함. 3. 억지로 이치에 닿지 아니한 말을 함.
어느 한 지점을 깊이 파고들다 보면 때로는 나를 가로막는 무언가와 조우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답답하게 수축되어 있는 문장들이 즐비하다. 고민 끝에 써 내려간 그 문장은 어디에 닿게 되었을까. 문장 하나하나에 담아낸 사념은 기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어째서 문장의 형태만큼은 그렇게나 고집스럽게 유지되고 있는지, 어느 날엔가 다시 들여다보는 날에는 왜 그처럼 구태의연할 수밖에 없는지 의아하다. 내가 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무표정한 얼굴이 도둑처럼 나타난다. 너는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억지로 이치에 닿지 아니한 말을 계속해서 뇌까리는 기분. 내가 나의 문장에 천착한다는 것보다도 이미 내 손을 떠난 문장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더욱 기이하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기는 일 역시 천착이 된다면, 천착이 갖는 의미의 수효가 끝없이 확장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구멍을 뚫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내게 있어서 지난날의 글을 돌아보는 일 또한 그렇다는 것이 오래된 사실이다. 이번에는 그들의 변함없는 무표정을 바라보는 대신 그들의 뿌리를 천착해 보는 것은 어떨까.
문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 문장독본 / 아름다움을 향한 질투는 나의 힘 - 금각사
모든 문장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제대로 된 목적의식을 갖지 않으면 나의 문장들이 깃털처럼 가벼워질 것이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보다 넓고 깊게 세상을 관찰하며 그것을 옹골차게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을 추가한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가벼운 문장들 속에 내재된 무게감을 응시한다. 그들이 내게 '너의 문장들은 하나같이 무겁다'고 말한다. 무거운 것은 나라는 사람인가, 나의 문장인가.
그전까지는 나와 나의 문장이 유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 서로가 닮아갈 수는 있을지언정 동일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솔직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한 일이 될 수 있으므로 나와 나의 문장 간의 경계선은 언제, 어디에 그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반복될 때 나는 미시마 유키오의 글을 읽었다. <금각사>가 문장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책이라면 <문장독본>은 문장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책이었다. 문장의 아름다움을 논하기 전에 문장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직시해야 한다. 나는 아직도 문장에서 무거움을 덜어내는 일에 익숙지 않다.
왜냐하면, 미는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만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미라는 것은 마치, 뭐라고 할까, 충치 같은 거야. 그건 혀에 닿아 신경 쓰이고 아프게 해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더 이상 아픔을 견딜 수 없게 되면 치과 의사에게 뽑아달라고 하지.
비록 내가 쓴 문장이지만 그것이 나의 것은 아니며 또한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의 문장들은 여전히 아름다워지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문장이 배태한 방향성이다. 나는 나대로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문장마다 담겨 있는 나의 생각들은 어김없이 변화하고, 나는 언젠가 또 다른 문장독본을 찾아 헤맬지도 모른다. 그것 역시 퍽 즐거운 일이 되지 않을까.
최선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에게 -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하나의 최선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차선들이 희생되어야 하는지. 장 그르니에의 <존재의 불행>에 등장하는 그의 주장과 더불어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나의 기억 속에 가장 오래토록, 강렬하게 남아있는 글 중 하나이다.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도서/문학] 섹션의 글 중에서 하나만 남겨야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최선이 다른 선들을 희생시킨다는 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정확히 어떠한 경로를 통해, 어떠한 논리를 거쳐 최선이 여타의 선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내가 최선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모든 선들을 희생시켜왔다는 사실에 문득 경악할 뿐.
캉디드 역시 본인이 최선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매순간 최선의 결과를 낳지 않았음을 깨닫고 난 후에도 그처럼 최선을 선택하고자 했던 지난 삶의 궤적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다른 선들을 희생시켰는지 알지 못한다. 그는 선과 악이 세상에서 어떤 논리로 작동하고 있는지, 정말 분리될 수 없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것들을 알아야 할까? 물론 그것을 알기 위해 투쟁과 반목과 작척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가, 누구나 저마다 가지고 있다는 개인적인 지옥의 출현이 반복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도대체가 그 무엇 하나 결론을 안겨주지 못했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선악에 관한 문제를 정의내리는 것은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헛된 최선을 포기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충돌과 갈등의 키워드로 얼룩진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그 속에서 저마다의 대의와 신념을 발견하고 견고히 함으로써 그것을 선악의 차원까지 밀고 나가는 일 역시 이제는 흔한 일이 되었다. 내가 옳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선일 수는 없고, 내가 최선이라고 믿는 것이 나도 모르는 차선들을 짓밟을 때 나는 어디로 눈을 돌려야 하는가? 그리고 당신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적잖은 분란 가운데 천연스럽게 침묵을 고수하는 회색분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매 순간 최선을 희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이 말이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금 나를 위의 글로 찾게끔 할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현재로서는 조금은 서글픈 일이다.
언어와 사고의 관계성 : 사고에서 언어로 - 달몰이
아트인사이트 에디터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올렸던 글은 조에 부스케의 <달몰이>를 다루고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도 <달몰이>가 보여주었던 생의 아름다움과 비참함에 천착하고 있는 듯하다. 생은 예기치 못한 방향과 모습으로 그 뿌리가 뻗어나가고 사랑의 다른 이름들을 내게 던져놓는다. 사랑에는 다른 이름이 필요치 않다는 주장도 지금의 내게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매 순간 이름은 태어난다.
"생에 대한 네 지식은 생에 대한 네 사랑의 정도에 달려 있을 뿐."
나는 생을 모르고 생도 나를 모른다.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의 생을 사랑했다면, 우리는 우선 생의 깊이를 확인했을 것이고 선별된 지식들로 그 깊이를 채워나갔을 것이며 그 모든 과정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며 확인하는 사랑과도 같을 것이다. 매 순간 타인들 혹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재배치되는 인생은 당연하게도 가변적이다. 한순간도 멈추는 법이 없이 변화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고정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곧 언어다. 언어는 세계의 기호이며 사고는 인간의 기호다. 언어는 완전하지만 사고는 불완전하다. 언어가 사고를 짓누른다. 마치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내가 천착하는 대상이 생인지 사랑인지 나로서는 아직 불분명하다. 완전치 않은 생은 그만큼 매혹적이고 나의 사고는 지금도 언어를 향해 나아간다. 나는 앞으로의 글 속에서 내가 이름 붙일 모든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다. 내가 사랑이라고 명명한 과거의 모든 글은 어느 순간 나를 앞서간다. 그들에게 이 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